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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13-②'대인춘풍 천객만래' 파고다 슈샤인 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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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경력의 82세 구두닦이

종로3가 지하철역 4번 출구 앞에 자리를 잡은 정 할아버지가 등에 가격표를 메달고 구두를 닦고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종로3가 지하철역 4번 출구 앞에 자리를 잡은 정 할아버지가 등에 가격표를 메달고 구두를 닦고 있다. 백소아 기자 sharp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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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주상돈 기자, 김보경 기자, 김민영 기자] 파고다공원 주변에는 '노천카페' 말고도 멋쟁이 할아버지들로 북적이는 곳이 또 있습니다. 바로 '길거리 구둣방'인데요. 할아버지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종로3가 지하철역 4번 출구 앞이라는 요지에 입지한 때문일까요. 변변한 간판도 없는 길거리 구둣방이지만 이곳엔 손님이 끊이지 않습니다.

20년 경력의 베테랑 구두닦이 정모 할아버지(서울 면목동)가 이곳에서 영업을 합니다. 이 할아버지의 연세는 우리나이로 무려 여든둘. 1932년생이지만 아직 정정하게 '현역'으로 뛰고 계십니다. 할아버지는 지난 2006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네요. 보통 아침 8시에 나와 오후 6시면 일을 마친답니다. 비나 눈이 오는 날을 제외하곤 매일 같은 자리에 구둣방을 연답니다. 보통 하루에 찾는 손님이 60여명에 달한다고 하니 한가할 틈이 없을 듯합니다. 인테리어는 플라스틱 우유박스 엎어두고 그 위에 깔고 앉은 앉은뱅이 의자 하나와 손님용 플라스틱 의자 2개가 전부입니다. 연장도 단출합니다. 검은색 구두약과 구둣솔, 물통은 '구두광'용이고 플라스틱 통에 담긴 보조굽과 못은 '구두징'용입니다. 손님들이 신는 슬리퍼에는 근처 모텔 상호명이 적혀 있네요.
'구두광택 1000원, 구두징 1000원'은 이 구둣방의 정찰가입니다. 할아버지는 흰 포대에 매직으로 꾹꾹 눌러 쓴 이 가격표를 등에 메달아 홍보용으로 활용하시는데요. 그 가격표 아래 '대인춘풍 천객만래(對人春風 千客萬來)'라고 한자로 함께 써 놓은 글씨에는 할아버지의 영업비밀이 담겨 있는 듯합니다. '사람을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대하면 천명의 손님이 만번이라도 찾아온다'니 그 글귀에서 장인(匠人)의 풍모마저 느껴집니다.

두 번째 이 구둣방을 찾은 지난 5일 오후에도 할아버지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정 할아버지는 현란한 손기술을 놀리는가 싶더니 구두 네 켤레를 10여분 만에 반짝반짝 윤이 나는 새 신발로 변신시켜 놓습니다. 한 손님이 "잘 지내셨소?"라는 인사를 하고는 말없이 구두만 내밉니다. 구두닦이 정 할아버지는 구두를 한 번 뒤집어 보고는 솔에 구두약을 묻힙니다. "뭣하러 왔는지 딱 보면 알지. 이 아저씨는 징을 간지 얼마 안 됐어."

의자가 비기 무섭게 또 손님이 왔습니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김 할아버지(70ㆍ서울 봉천동)는 "나 구두징 갈아주소"라며 구두를 벗어 줍니다. "괜찮아. 그냥 신어. 아직 한 달은 더 신겠구만. 1000원이라도 아껴야지." 손님 할아버지의 주머니 사정까지 배려하는, 그래서 '천객만래'하는 정 할아버지의 영업철학이 그대로 드러나는 말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파고다공원 인근에는 세 명의 구두닦이 할아버지가 있었답니다. 그런데 공원 동문 앞에서 구두를 닦던 할아버지가 두 달 전부터 나오지 못하면서 이제는 종로3가 4번 출구 앞에 정 할아버지를 포함해 구두닦이 할아버지 2명만 남았다는군요. "여기서 꼭 구두를 닦았는데 이 사람이 아프다고 한두 달 전부턴 안 나오더라고. 나보다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뇌에 이상이 생기면 어쩐데…." 동문을 지나던 한 할아버지는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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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20<끝>-④지면을 필름삼아 펜을 렌즈 삼아 다큐 찍듯 썼죠





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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