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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5-① 도시 투명인간으로 14년…'무표정의 또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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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 파고다]5-① 도시 투명인간으로 14년…'무표정의 또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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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시리즈⑤ 파고다 고정출근 尹노인 이야기 '14년 같은 하루'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고 지루한,
그러나 당신이 언젠가 주인공일 수 있는 영화 한 편
[아시아경제 주상돈 기자, 김보경 기자, 김민영 기자] 파고다공원을 섬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섬 속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두 사람이 아닌 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껄껄거리고 또 시끌시끌 싸움판도 벌입니다. 서로들끼리는 무척 낯이 익습니다. 인생의 시간에서 내몰린 황혼의 방황자들, 혹은 도시 속의 치열한 경쟁에서 두 손 들고 나와버린 이탈자들이, 양지바른 곳의 비둘기처럼 모여 등을 비비고 ‘징한’ 욕지기를 나누며 하루를 채웁니다. 윤 노인은 그 무리 중의 평범한 한 분입니다. 한때 돈도 만졌고 일 욕심도 억척이었던 그는 어느 날 세상에 대해 입을 닫고 14년간 파고다 일대로 출퇴근해왔습니다. 어떤 인생이든 소설 한 권 아닌 것이 어디 있으며 영화 한 편 아닌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독백 같은 윤 노인의 말씀 속에서, 그의 쳇바퀴 일상 속에서 일어났다가 사그라지는 작고 여린 감흥들과 그림자처럼 뒤에 숨어있는 지난 삶의 흔적들을 얼핏얼핏 만납니다. 14년의 여정이 겹친 하루의 여정을 함께하며, 파고다인생의 내부 속으로 들어가 보았습니다.

[그 섬, 파고다]5-① 도시 투명인간으로 14년…'무표정의 또하루' 원본보기 아이콘


#SCENE① 08:50 낚시가게
7일 오전 8시50분.  윤 할아버지는 어김 없이 로타리 낚시회를 찾았다.

7일 오전 8시50분. 윤 할아버지는 어김 없이 로타리 낚시회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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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길 바쁜 걸음이 뜸해진 오전 8시50분. 신금호역(서울 금호동) 버스정류장 옆에 자리 잡은 '로타리 낚시회'. 윤 할아버지(78)가 어김없이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선다. 오늘은 옅은 베이지색 점퍼에 회색 중절모까지 한껏 차려입었다. 2주 전 막내딸이 사다준 것이란다. 비슷한 연배의 가게 주인은 "왜 또 와"라고 심드렁하게 내뱉으면서도 손은 어느새 커피를 탄다. 윤 할아버지는 주인의 핀잔에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아 라일락 담배 하나를 꺼내 문다. 가게 주인은 종이컵에 탄 믹스커피를 내밀며 "또 피운다. 또 피워"라고 쏘아붙이고는 담배 뺏는 시늉을 한다. 윤 할아버지는 그의 손을 피해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이놈이 형님한테 까분다"며 아무렇지 않게 담뱃불을 붙인다. 윤 할아버지가 종묘광장공원에 다니기 시작한 이후 14년째 반복되는 아침 풍경이다.

담배를 한 모금이나 빨았을까. 할아버지의 허리춤에서 휴대전화가 요란하게 울린다. 서울 망원동에 사는 세 살 아래 친동생의 전화다. "나도 까먹고 있었는데 이놈이 용케 알고 전화를 했네. 점심 사주러 온다네." 허허 웃는 윤 할아버지. 이틀 뒤가 윤 할아버지의 78번째 생일이다.
#SCENE② 9:20 버스
윤 할아버지는 한결같이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는다. 운전기사도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눈치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삶이 흐트러지는 것이 두려워서 일까. 버스에 탄 그는 고개도 잘 돌리지 않고 묵묵히 내릴 정류장만 기다렸다.

윤 할아버지는 한결같이 같은 버스를 타고, 같은 자리에 앉는다. 운전기사도 이미 그를 잘 알고 있는 눈치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삶이 흐트러지는 것이 두려워서 일까. 버스에 탄 그는 고개도 잘 돌리지 않고 묵묵히 내릴 정류장만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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앉은자리에서 담배 두 개비를 태운 할아버지는 30여분 만에 가게를 나섰다. 늘 같은 시간이니 정류장에 앉은 지 그리 오래지 않아 버스가 도착한다. 7212번 녹색 지선버스. 버스는 할아버지가 타기 편한 위치에 정확히 멈춰 섰다. 늘 앉던 앞에서 두 번째 자리는 지정석이 된 지 오래다.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는 거리의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할아버지. 모두 열세 정류장, 25분이 걸려 종묘공원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이렇게 윤 할아버지는 14년째 같은 시간 같은 노선의 버스를 타고 공원으로 '출근'을 한다. 아내가 폐섬유증으로 꼬박 7년을 앓다 세상을 떠난 게 2000년. 그때부터 할아버지의 '출근'은 휴일도 없이 계속됐다.

#SCENE③ 10:00 종묘공원
지난달 11일 윤 할아버지가 맞수인 유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고 있다.

지난달 11일 윤 할아버지가 맞수인 유 할아버지와 장기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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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에는 일찍 '출근'한 또래 노인 30여명이 장기와 바둑을 두거나 옆에서 훈수를 두면서 구경하고 있다. 잠시 그 틈에 껴 장기를 구경하던 윤 할아버지는 공원을 나와 종로성당 뒤편 노점으로 향한다. 골목을 지나면서 장기판을 숨겨놓은 그만의 비밀의 장소를 살짝 열어 확인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날은 평소 먹던 1000원짜리 야채 크로켓 대신 500원짜리 커피 한 잔을 마셨다. 두 시간 후면 동생과 점심을 해야 하니 미리 배를 채울 필요는 없는 것이다. 평소 윤 할아버지는 밥에 물을 말아 아침을 해결한다. 이날도 이틀 전 직접 지은 밥에 물을 말아 열무김치를 얹어 먹었다. 또 보통 때 점심은 인근 슈퍼에서 1050원을 주고 컵라면을 사 먹거나 노점에서 1000원짜리 빵을 사 먹는다. 노점 간이 의자에 앉아 30여분 동안 커피를 마시고 다시 공원을 한 바퀴 돈다.

저편에서 장기 맞수인 유 노인이 알은체한다. 장기판이 벌어졌다. '한(漢)나라'를 잡은 윤 할아버지는 30여분의 공방 끝에 '포(包)'로 유 노인을 이겼다. 며칠 전 석패를 보기 좋게 복수했다. 내친김에 한 판을 더 두던 윤 할아버지가 갑자기 일어선다. 동생의 전화를 받고서다. 뛰다시피 걸어 공원을 빠져나온다. 버스정류장에 서있는 동생이 보이자 그제야 걸음걸이를 늦춘다.

#SCENE④ 12:00 뷔페형 기사식당
6개월 만에 만난 동생과 눈인사를 한 뒤 윤 할아버지가 앞장서 걷기 시작한다. 10여분을 걸어 도착한 한 귀금속 상가 앞. "맛있는 것 사드린다니까 여기는 왜 왔데?" 동생의 핀잔에도 윤 할아버지는 "여기가 맛있어"라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5000원짜리 뷔페형 기사식당. 두 사람은 접시에 흑미밥과 콩나물 무침, 호박볶음, 브로콜리, 오이소박이, 부추전 등을 담고 국그릇에 순두부를 담았다. 말 없이 밥을 먹던 동생이 "맛있네요"라고 운을 띄우자 신난 윤 노인은 "여기가 싸고 맛있어"라며 웃음 짓는다. 식사를 마친 동생이 따뜻한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 온다. "식사는 잘하죠?" "요새 몸은 어때요?" "애들은요?" 쏟아지는 동생의 안부에 윤 할아버지는 "괜찮아, 괜찮아"라고 짧게 답한다. 그렇게 한동안 침묵 속의 대화가 오갔다.

#SCENE⑤ 13:30 다시, 그 공원
동생과 점심을 먹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온 윤 할아버지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동생과 점심을 먹고 다시 공원으로 돌아온 윤 할아버지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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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짧은 동생과의 해후를 마치고 윤 할아버지는 다시 공원으로 돌아왔다. 공원은 오전보다 많은 100여명의 사람들로 북적인다. 오전에 장기를 같이 두던 유 노인이 보이지 않는다. 장기를 두는 대신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서서 30여분 동안 말 없이 장기를 구경한다. 장기를 구경하다 힘에 부치면 앉았다 섰다를 반복하는 사이 시간은 어느새 오후 4시가 가까워졌다. 말 없이 일어나 공원을 빠져나온 윤 할아버지는 횡단보도를 건너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아침에 탔던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고 아침보다 5분이 더 걸려 신금호정류장으로 돌아왔다.

#SCENE⑥ 17:00 집 앞 골목
윤 할아버지는 서울중앙병원(구 복음병원) 뒤편의 빌라 3층에 혼자 산다. 젊었을 때 남대문시장에서 시계점을 하고 소금 무역상을 하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슬하에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다. 그나마 막내딸은 가끔 얼굴을 보지만 다른 자식들은 연락이 닿은 지 오래다. "그놈 얘기는 꺼내지도 마." 아들 얘기를 묻자 손사래를 친다. 구구절절한 사연을 차마 더 묻는 것도 실례다 싶다. 버스정류장에서 집까지 할아버지의 걸음으로 15분. 병원이 보이는 골목에 들어서자 말 없이 걷던 할아버지가 뒤따르던 기자에게 몸을 돌리며 인사를 건넨다. "내일 또 봐."

◆윤 할아버지(1935~)

"결혼? 56년이던가, 57년이던가…."

윤 할아버지는 결혼을 언제 했는지 선뜻 기억해 내지 못합니다. 고등학교 졸업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야 "아, 고등학교 졸업한 해였으니까 1958년이네"라며 가까스로 결혼한 해를 기억해 냅니다. 하지만 자식들 나이는 기가 막히게 대답합니다. "큰아들은 쉰 다섯이고 딸 하나는 쉰 하나, 막내딸은 마흔 여덟이야." 국민학교에 입학한 해도, 남대문시장에서 억척스럽게 시계 장사를 시작한 때도 가물가물해졌지만 매년 한 살씩 더해지는 자식들 나이는 척척 꿰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입니다. 큰아들에 대해 묻자 "애들 얘기는 하려면 골치 아파"라며 입을 굳게 닫아버립니다. 다시 슬쩍 큰아들 얘기를 꺼내자 "묻지 말라니까"라며 버럭 화를 냅니다. '더 이상 자식들 얘기는 꺼내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서야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던 윤 할아버지를 붙잡을 수 있었습니다.

윤 할아버지는 충남 청양에서 1935년에 태어났습니다. 그 시절 다 그랬듯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습니다. 3남3녀 중 셋째로 태어났지만 형님과 누님이 세상을 일찍 떠나 큰아들로 자랐습니다. 넉넉지 않은 형편에도 서울로 유학을 올 수 있었던 것도 맏아들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인 1955년 상경했습니다. 이때부터 3년간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 위치한 6촌 아저씨 집에 살며 중앙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스무 살이 넘은 나이에 입학한 늦깎이 고등학생이었던 것이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결혼했답니다. 이때 현재 살고 있는 서울 금호동에 터를 잡았는데 결혼을 하고는 바로 3주 후에 군대에 갔다는군요. 전역 후에는 남대문 시장에서 중고시계를 팔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시계 도매상에게 받은 중고시계를 조금씩 팔다가 자연스럽게 알게 된 밀매 경로를 통해 일제 시계를 밀수해서 팔았답니다. 할아버지는 다 지난 이야기라며 털어놓았는데, 이후엔 밀수한 금괴도 팔면서 제법 많은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이때는 무서운 것도 없었어. 잡히면 쇠고랑 차겠지만 자식이 셋이나 있었으니까."

이 돈을 밑천으로 시작한 것이 소금장사. 호주에서 수입한 소금을 난지도에 산처럼 쌓아놓고 전국 각지로 배달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좀 풀리나 싶던 일이 어느 순간 꼬이기 시작했답니다. 당시 일반 상거래에서 많이 사용되던 '문방구 어음'을 대량으로 받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1988년 윤 할아버지는 2억여원의 부도를 맞았습니다. 3년이나 돈을 받으러 쫓아다녔지만 한 푼도 못 건졌다네요. 자식들이 눈에 밟혀 넋 놓고 있을 수만도 없는 일. 털고 일어나 동대문 책방골목에서 10여년을 장사했습니다. 자식들이 출가한 것도 이때입니다. 자식들을 모두 출가시키고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 7년간 투병생활을 하던 아내가 먼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무렵부터 적적함과 허전함을 달래려 시작한 할아버지의 '공원 출근길'은 벌써 14년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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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상돈 기자 don@asiae.co.kr
김보경 기자 bkly477@asiae.co.kr
김민영 기자 argu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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