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독, 프랑스, 영국 등 유럽에 공부하러 나간 유학생 및 현지 한인들이 북한 대사관과 평양을 드나들며 간첩교육을 받고 국내 인물들과 공조해 대남적화활동을 벌였다는 겁니다. 혐의자 중에는 유명 작곡가 윤이상씨를 비롯해 화가 이응로씨 등이 포함돼 있고 그 인원이 무려 194명에 달해 나라안이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수사는 국내로도 파급돼 유럽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교수 및 강사를 맡고 있던 사람, 연구소장, 공무원 등이 대거 혐의자에 올라 조사를 받았습니다. '귀천'으로 유명한 천상병 시인도 혐의자 중인 한 사람과 친구로 친하게 지냈다가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3개월 동안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그는 결국 풀려나긴 했으나 행려병자 신세로 전락할만큼 폐인이 돼 버렸습니다.
법원의 심리는 1969년 3월까지 계속돼 최종 사형 2명,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 등의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한참 뒤인 2006년 1월 과거사 진실규명위에서는 당시 정부가 단순 대북 접촉을 국가보안법과 형법상의 간첩죄를 무리하게 적용했다며 정부에 사과를 권고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중앙정보부는 왜 사건을 무리하게 적용했을까요? 이는 1967년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집권당은 '3선 개헌'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해 6월 8일 치러진 6.8총선에 대한 부정선거 시위가 격화되고 있었던 때 였기 때문에 국면전환용 사건이 필요했을 겁니다.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에 애꿎은 사람들만 곤욕을 치른 셈이라고 해야 하나요? 하긴 그런 일이 어디 한두번 이었던가요...
백재현 뉴미디어본부장 itbri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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