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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칼럼]그리스에게 필요한 것, 불굴의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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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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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깊은 상흔을 남긴다. 한국이 그랬고 지금 그리스가 그렇다.

1997년 11월23일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날은 제2의 국치일로 기록됐다. 한국은 IMF 구제금융을 지원받는 것으로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한국인들은 주제넘게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고 빚을 많이 써 위기를 자초했다는 비난을 샀다. IMF는 고금리와 자본시장개방, 기업구조조정, 노동의 유연성 등의 처방전을 내렸다.
한국인들은 그 비난을 눈물로 삼켰다. 공기업을 팔고, 저금통을 깨고, 돌반지를 팔아서 IMF 처방전을 성실히 이행하고 빚을 갚았다. 이를 악문 한국인들에게 '가난은 그저 남루(襤褸)'라는 미당 선생의 시구가 보탬이 됐다. 그래서 세계에서도 보기 드물게 한국은 일찍 IMF에 빚을 갚고 모범생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그렇지만 외환위기는 긴축과 죽음, 이별이라는 좀체 치유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다. IMF의 잘못된 처방과 국제투기꾼들의 장난질도 함께 묻혔다.

18년이 지난 지금 그리스는 부채위기에 허덕이고 있다. 빚을 갚지 못해 나라가 거덜난 것이다. 그리스 역시 주제넘게 유럽연합(EU)에 가입한 게 화근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그리스 역시 분수에 넘치게 일은 적게 하고 복지지출을 늘렸기 때문이라는 비난이 높다. 국가와 국민이 절약할 생각은 않고 돈을 물 쓰듯하는 도덕적 해이를 함께 저지른 만큼 이런 고초를 당해도 싸다는 가시 돋힌 말도 많다.

국고가 바닥난 그리스 역시 IMF와 유럽집행위원회(EC),유럽중앙은행(ECB) 등 그리스 채권단 3인방에 허리띠를 졸라매는 긴축안을 내놓았다. 연금삭감과 세율인상,민영화계획 등 120억~130억유로에 이르는 재정지출을 줄이는 내용이 골자다. 이번에 740억유로의 지원을 받지 못하면 그리스는 부도를 낼 판이라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조치였다.
그러나 채권단은 영 못 믿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더 확실한 것을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는 모양새다. 특히 최대 채권국인 독일은 12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유로존(유로화 사용 19개국) 정상회의에서도 강경한 목소리를 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추가적인 개혁안이 나오지 않을 경우 그렉시트(Grexitㆍ그리스의 유로존 탈퇴)도 불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인구 1080만명에 국내총생산(GDP)의 177%인 3170억유로의 빚을 진 그리스를 계속 압박해서 없는 돈을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과연 그리스 사태의 올바른 해법일까. 유럽 채권단은 과거 그리스에 긴축조치를 요구했다가 그리스 위기를 키운 과오를 다시 범하려는 것 같다. 긴축으로 그리스의 투자와 소비가 위축되고 경제는 불황에 빠져 세수능력은 오히려 줄었다. 그런데도 유럽 채권단은 그리스에 이미 상당히 축소된 연금마저 더 삭감하도록 고삐를 죈다. 뉴욕타임스조차 사설에서 '이런 요구는 그리스 경제를 더욱 위축시킬 것'이라고 질타했지만 귀담아듣는 것 같지 않다.

채권단은 그리스 사태에 대해 책임이 없는지 묻고 싶다. 돈을 빌려줄 때는 채무자의 상환능력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 금융기관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리스 국채를 마구잡이로 사들여 그리스가 빚에 중독되게 한 책임이 있지 않는가. 그리스는 재정이 파산 났지만 이를 모른 체하는 채권단은 도덕적으로 파산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리스인들을 무책임하다고 비난만 해서는 그리스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유럽 지도자들은 유로존에 대한 위협을 종식시키고 싶다면 그리스를 지원해야 마땅하다. 빚의 무게에 눌려 서지도 못하는 그리스를 도덕적 해이에 빠졌다고 비난해 봐야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인들도 구제금융을 신청한 2010년 이후 빚을 갚기 위해 몸부림을 쳤음을 인정해줘야 한다.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은 그리스의 기를 꺾지 않는 것이다. 65세의 나이에, 백발이 되어서도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절대 포기도 하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고 말겠다는 조르바가 가진 기백을 살리는 일이다. 그리스가 재기하고 못하고는 불굴의 조르바가 살아나고 못하고에 달려있지 않을까.





박희준 논설위원 jacklond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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