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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두향, 꽃지는 날도 합방례를…(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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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5)

[千日野話]퇴계·두향, 꽃지는 날도 합방례를…(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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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암풍병은 사인 우탁이 읊었고
구로모담은 구옹 이지번의 작품일세
삼도일하는 밝달선비 명월의 천안(天眼)이고
석미신월은 십세천재 이산해의 시격일세
취암무천은 토정 이지함의 선풍이고
겸산공수는 퇴계 이황의 거경(居敬)일세
여인여산은 공서의 인내천(人乃天)이며
잠대문향은 관기 두향의 천년안(千年眼)일세

어화, 무명의 벽수단산에 이름이 붙여졌으니, 천하의 단양팔경이 조선 일등 유람처가 되겠구나. 얼씨구.

며칠 뒤 두향에게 관의 노복(奴僕) 하나가 찾아왔다. 노복의 손에는 작은 서찰(書札) 하나가 들려있었다. 이황의 편지였다. 두향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펼쳐보니 이렇게 씌어있었다.
“꽃이 피는 날도 귀하지만 그것이 모두 지는 날도 똑같이 귀할 듯 하오. 우리 방매(放梅, 꽃송이를 내놓음)의 날에 사랑의 예를 치렀듯, 낙매(落梅)일에도 예를 치르는 것이 어떠하오리까? 그날 피었던 도수매가 오늘 문득 모두 졌습니다.”

두향은 답서를 써서 보냈다.

“두보는 <곡강(曲江)>이란 시에서, 일편화비감각춘 풍표만점정수인(一片花飛減却春 風飄萬點正愁人)이라 읊었습니다. 한 잎의 꽃이 날아 떨어져도 봄날을 줄이는데 만 송이가 바람에 흩날리니 내가 어찌 서럽지 않겠는가. 도수매 피던 날에 그토록 행복했던 마음을, 지는 날에 다시 나누고자 하시니 이런 깊은 은총이 어디 다시 있겠사옵니까. 남은 봄향기를 모두 거둬 품고 그 창(窓)으로 오늘밤 날아가겠사옵니다.”

밤이 되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두향은 지우산(紙雨傘)을 들었다. 거문고를 든 어린 종이 뒤를 따랐다. 이들은 동헌 뒤편의 관사로 달려갔다. 이황은 조촐한 주안상을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오너라. 마침 매우(梅雨, 매실이 익는 비)가 쏟아지니, 참으로 향기로운 밤이구나. 두향의 거문고 소리에 허기졌으니, 어서 그 가락을 듣고 싶구나.”

“예. 갑진년(1544년) 나으리가 홍문관에 계시던 때 읊으신 <호당(湖堂)매화>가 어떨까 합니다.”

“늦봄 독서당(호당이라고도 불렀음, 사가독서를 하던 곳)에 피는 매화를 보고 감회가 일어 소동파 시(‘송풍정 아래 매화’)를 차운하여 읊었던 기억이 나는구려. 그 시를 기억한단 말인가.”

“예. 제가 즐겨 낭송하던 앞부분을 노래로 불러볼까 합니다.

나 예전에 남쪽 매화마을에 간 적이 있네(我昔南遊訪梅村)
바람안개 속 헤매는 나날, 시 읊을 정신도 막혔네(風烟日日銷吟魂)

하늘끝에서 홀로 만난 절세미녀에 탄식했네(天涯獨對歎國艶)
역마(驛馬)길에 꽃가지 꺾어줬네 먼지 속 황혼을 슬퍼하며(驛路折寄悲塵昏)

그 이후 서울서 가마 타면서도 생각 나서 괴로웠네(邇來京輦苦相憶)
맑은 꿈 밤마다 언덕과 뜨락을 찾아 날아다녔는데(淸夢夜夜飛丘園)

이곳이 바로 서호(西湖, 송나라 임포의 매화마을)인줄 어찌 알았겠나(那知此境是西湖)
해후하여 마주보니 그 웃음이 따뜻하다(邂逅相看一笑溫)

꽃마음이 적막하여 끝봄에 피었구려(芳心寂寞殿殘春)
곱디고운 흰 얼굴이 첫햇살을 맞는구나(玉貌?約迎初暾)”

“먼 남녘땅에서 본 매화가 눈에 사물거렸는데, 한양의 호당에 핀 매화도 그 못지않게 아름다웠지. 늦봄에 꽃을 매단 풍경을 보노라니, 임포의 마을이 따로 있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네.”

“매화를 경국지색으로 은유한 국염(國艶)이란 표현이 마음에 들어왔습니다. 한 나라를 대표할 미인이라 하심은, 매화의 어떤 점을 상찬(賞讚)하는 뜻이옵니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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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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