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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퇴계가 쌍룡곡에서 운우지정을…(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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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1)

[千日野話]퇴계가 쌍룡곡에서 운우지정을…(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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漠漠高山梵宇開 燒香默坐萬緣灰

막막고산범우개 소향묵좌만연회

高朋講到先天學 妙旨尋從太昊來
고붕강도선천학 묘지심종태호래

一水廻明似鏡 千峯環擁翠成堆

일수영회명사경 천봉환옹취성퇴

暮年活計斯爲足 肯向人間浪首回

모년활계사위족 긍향인간랑수회

이날 밤 권상하와 함께 머물렀던 친구는 18세 연하인 성만징(1659~1711)이다. 이 친구는 북송의 소옹(邵雍ㆍ1011~1077)이 주창했던 선천학에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선천학은 역학을 새롭게 해석한 것으로 만물이 모두 태극에서 말미암아 변화 생성했다는 이론을 담는다. 그리고 천지간의 모든 현상을 숫자로 해석하는 독특한 유학철학이다. 성만징은 권상하에게 열심히 선천학의 묘리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태호(太昊ㆍ삼황오제의 하나인 복희씨, 팔궤의 창시자)이야기까지 풀어놓는다. 기이한 우주생성이론에 푹 빠진 조선의 젊은이들의 밤샘 대화가 상선암의 분위기로는 딱 맞게 느껴진다. 하지만 권상하는 그런 이론에 매몰되지 않고 얼른 풍경으로 빠져나와 물과 산의 아름다운 정경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담담하고 소박하게 살겠다는 늘그막의 맹세까지 새겨놓는다.

상선암의 암벽에는 수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는데, 그중에 권상하가 들어간 7인의 명단 각자(刻字)도 있다. 권상하, 이기홍, 김창석과 그 아우 김명석, 영춘현감 정태하, 이기덕, 곽의한 이렇게 일곱이다. 1700년(숙종26년)에 새긴 것이다. 권상하가 60세가 되던 해이다. 이들 중 특히 권상하와 친하게 지내던 동갑내기가 있었는데, 이기홍이란 친구다. 이기홍이 청풍부사로 지내던 시절 선암에서 놀며 서로 차운(次韻)한 시가 있다.

世外奇遊幸與同 淸霜初落正楓(세외기유행여동 청상초락정감풍)

不妨分占華山半 共老泉聲嶽色中(불방분점화산반 공로천성악색중)

기상천외한 장난들 용케 함께 저질렀는데

맑은 서리 처음 내리니 단풍 제대로 물들었네

붉은 산을 딱 둘로 나눠서

물소리 산빛 가운데 함께 늙어도 좋으리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우정이 느껴지는 시이다. 화산(華山)은 단풍이 물든 붉은 산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원나라의 김이상과 제자 허겸이 금화산(金華山)을 남북으로 둘러 나눠 가졌다는 이야기에서 빌린 표현이기도 하다.

공서는 와룡암 앞에 섰다. 와룡폭포를 이룬 바위로, 누운 용과 같은 형상이다. 폭포소리는 천둥을 방불케 하는데, 바위 이끼에는 햇살들이 아른아른 들어와 푸른 기운을 돋운다. 와룡암 옆엔 경천벽(擎天壁)이 있다. 하늘을 들어올리는 벼랑이란 뜻이다. 층층으로 쌓인 바위들이 장관이다. 멀리 산안개가 가득하여 비를 부를 것만 같다. 웅장한 산림 속에 동천(洞天)이 펼쳐져 있다. 선암사 수일암을 지나 운암촌까지 오른다. 계곡의 신령스러운 원천(源泉)으로 다가가면, 선계(仙界)의 비밀을 품은 듯 계두산(鷄頭山)이 기다린다. 공서는 일행들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와룡곡은 쌍룡곡이나 선암곡처럼 우람한 바위의 위용은 없으나, 담담하고 소박하여 선도(仙道)의 홀연한 경지를 말하는 데 이보다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저는 신선이란 개념을 중국적인 도가(道家)로만 연결하는 것이 과연 옳은지 의문을 지니고 있습니다. 선인(仙人)사상의 원천은 중국이 아니라 여기 동국(東國ㆍ조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선은 하늘의 자손(天孫)임을 강조해온 우리 겨레의 고유개념입니다. 고조선의 단군이나 그 이전의 역사들은, 하늘과 인간이 직접 소통하는 선(仙)의 역할을 부각시키고 있기도 하고요. 단군은 천신에 제사지내는 제사장이었고, 신라의 화랑이나 고구려의 조의선인 또한 그런 일을 맡은 국가의 선인(仙人)들이었지요. 화랑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도 이어져, 토속신앙과 화랑을 기리는 팔관회가 번성하였습니다. 조선에 와서 그런 명맥들이 많이 끊어졌다 할 수 있습니다.” 〈계속〉

▶빈섬의 스토리텔링 '千日野話' 전체보기



이상국 편집 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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