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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임라이트]"세트장서 느꼈던 울분, 익숙해진다는 게 무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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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크리처' 한소희, 실종母 찾는 윤채옥役
무력화 10년…母 찾으며 진실 마주할 힘 얻어
"역경·고난 견딘 삶, 누굴 비난할 수 있나"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영화·드라마는 매년 나온다. 대부분 그럴듯한 소재와 사건으로 민족주의를 부추긴다. 자칫 역사의 진실에 다가가는 데 방해가 된다. 넷플릭스 시리즈 '경성 크리처'는 아이러니하게도 허황한 상상으로 위험 요소를 줄여간다. 일제가 경성에 있는 옹성병원 지하에서 인체실험을 진행해 괴물을 만든다는 가정이다. 모티브는 중국 하얼빈 지구에서 급성 전염병 방역을 조사·연구하고, 세균전을 준비한 731부대. 1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내몬 페스트 벼룩이 곧 괴물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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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1부대에서 인체실험이 이뤄진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을 단지 '광기 어린 집단'이나 '악마 같은 일본군'으로 치부하면 문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없다. 냉정하게 그 너머에 있는 제국주의의 민낯을 들여다봐야 한다. 더불어 전쟁으로 몰고 간 사람들과 그것에 편승한 사람들, 그로 인해 짓밟힌 사람들이 같지 않다는 점도 잊어선 안 된다. 일련의 습득은 특정 재판이나 역사가의 작업만 확인해선 불가능하다. 무참히 짓밟힌 사람들부터 역사의 주체로서 목소리를 내야 한다.

'경성 크리처'의 윤채옥(한소희)은 이런 주체 의식을 고양하는 배역이다. 1화부터 진취적이거나 개혁적이진 않다. 오히려 무참한 학대와 핍박을 보고도 일본 순사들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지난 10년 동안 실종된 사람을 추적하는 토두꾼으로 활동하며 숱하게 목격한 터라 무감각한 편이다. 한소희는 "일제의 압박과 수모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단념했을 듯했다"며 "무력화된 배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진실을 똑바로 마주할 힘은 실종된 어머니를 찾는 과정에서 샘솟는다. 어떤 수모나 폭력도 견딜 각오로 위험을 무릅쓴다. 단순히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체실험실에 갇힌 아이들을 구출하면서 통한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다. 포박당한 상태에서도 인체실험을 주도하는 가토(최영준)에게 당당히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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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은 게 있는데, 어째서 너희들은 그리 당당한 것이냐? 내 어머니를 유린하고, 한 가족의 행복을 짓밟고, 무고한 사람들을 그렇게 많이 죽여놓고도 어찌 그리 뻔뻔할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이룬 위대한 성과와 업적은 너 따위가 함부로 논할 수 없는 영역이다, 조센징." "업적? 그래? 그런 식으로 미화하고 포장한다고 당신들의 죄까지 지워질까? 아닌 척한다고 당신들의 그 치졸한 열등의식을 감출 수 있을까?"

성장은 옹성병원을 나와서도 이어진다. 장태상(박서준) 대신 괴물이 된 어머니에게 공격받고 쓰러진다. 한소희는 "누군가를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줄 아는 인물로 거듭난 것"이라고 해석했다. "오로지 어머니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배회하던 초반 모습과 대조된다. 채옥이의 마음을 헤아려서인지 나도 모르게 대사를 변형해 표현했다. '엄마, 그만해'를 '엄마, 우리 이제 그만하자'로."


한소희는 다른 배역들을 보면서도 타인과의 교감 폭을 넓혔다. 끔찍한 고문에 못 이겨 독립운동 동지들을 팔아넘기는 권준택(위하준)이 대표적 예다. 그는 "일제강점기를 겪지 않았다면 누구도 발설에 대해 쉽게 논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경성 크리처'에서 좋아하는 대사가 장태상의 '이 시절을 겪지 않았으면 그러지 않았어도 될 것'과 나월댁(김해숙)의 '이건(고문은) 인간이 당할 짓이 못 된다. 들어가는 순간 이름 대고 나오라'다. 역경과 고난을 참고 견딘 삶이 묻어있다. 누가 누구를 비난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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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채옥을 연기하며 시대적 아픔을 간접적으로 겪어 생긴 확신이다. 한소희는 "인체실험을 자행한다고 설정된 지하 감옥 세트를 처음 찾았을 때 두려우면서 울분이 치밀었다"고 고백했다. "아이들까지 잡아다가 해부해 포르말린 병에 담아 놓지 않았나. 정말이지, 끔찍했다. 역한 자극성 냄새가 나는듯한 착각이 들어 구역질까지 나왔다. 실제가 아니더라도 아역들이 봐선 안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이 조금씩 무뎌지더라. 촬영이 힘들고 지칠 때 근처에서 새우잠을 청할 정도였다. 시체를 맡은 배우들이 아무렇게 내던져지는 광경을 봤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경악을 금치 못했는데, 나중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익숙해진다는 게 무서웠다."


실제로 731부대 의사들은 인체실험이 일상적으로 이뤄져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전쟁이 끝난 뒤도 다르지 않았다. 상식을 벗어난 행위는 동업자들 사이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부대원들의 잘못을 따지는 의학 연구자는 거의 나오지 않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서인지, 전쟁 승리라는 공통 목표가 있어서인지, 아니면 폭압적인 군국주의 속에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어서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결국 무참히 짓밟혔던 사람들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 어쩌면 한소희가 윤채옥을 품은 이유일 수 있다. "'경성 크리처'로 얻고자 한 건 목표가 하나인 채로 달려가는 또 다른 저의 모습뿐이었어요."





이종길 기자 leemea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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