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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 기름장어의 영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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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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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담한(심지어 살짝 통통한) 체구를 아는 사람들은 의아해 하겠지만 어릴 적 내 꿈은 수영 국가대표였다. 대표선수는커녕 변변한 대회 입상성적도 없이 조기은퇴(?)를 했지만 뭐 꿈이야 꿀 수 있지 않은가? 빌빌한 아들의 심폐지구력을 걱정한 어머니의 손에 끌려 시작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자 최상급 돌고래 반을 끝으로 더 올라갈 반이 없었다. 코치선생님의 권유로 선수 반에 들어갔는데 이 후 약 2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시절이다. 당시 유일한 훈련방법은 ‘뺑뺑이’를 돌리는 거였다. 힘이 들어 속도가 떨어지면 여지없이 쏟아지는 폭언과 체벌. 머리를 처박고 자유형을 하면서 울기도 했고 물속에서 괴성을 지르기도 했다. 문제는 눈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소리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점. 나중에 불안과 화를 다스리는 스포츠심리학이라는 공부를 하고 선수들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된 원형 경험이 여기에 있었다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 국가대표를 꿈꾸던 소년은 동네 수영장을 매일 다니는 배나온 중년이 되었다. 접영은 팔이 물에서 잘 안 빠지기 시작한 지 꽤 되었고 자유형과 배형도 오십견 탓인지 어깨가 아파 제대로 물을 잡기 어려워진다. 만만한 평형만 주구장창 반복하면서도 내 인생 최고 경지의 수영을 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더 이상 경쟁이나 기록을 다투는 수영을 하지 않는다. 하루하루 내 몸의 변화를 들여다보고 물과 함께 몸을 움직이면서 그 안에서 삶의 덕을 찾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형의 미덕은 기다림이다. 팔 동작이 대부분 물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다른 영법은 팔을 앞으로 보내는 동작이 물 밖에서 일어난다) 발로 찬 동력이 사라지기 전에 너무 빨리 팔동작을 시작하면 오히려 앞으로 가는 힘을 막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평형을 할 때 발로 물을 차고 몸을 쭉 뻗은 후 팔 동작 전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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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은 경계의 움직임이다. 인간은 물속에 영원히 머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늘로 치솟아 날아갈 수도 없다. 어차피 아무리 버둥거려 봐야 물과 공기의 접점에서 떠다닐 뿐이다. 이걸 깨닫고 수영을 전보다 더 사랑하게 된다. 두 가지 다른 세계의 접점을 유영하는 스포츠는 수영이 유일하다. 서로 이질적인 세계를 끊임없이 탐험하는 가운데 다름을 아우르는 능력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발 딛을 곳 없는 막막한 공간을 떠다니면서 약자에 대한 감수성이 길러졌을지도 모른다. 고 신영복 선생이 설파한 변방성(marginality)이라는 말에 열광했던 까닭도, 경계에서 꽃이 핀다던 함민복 시인의 노래가 그토록 아름답게 들렸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으리라.
지난 주 ‘기름장어’라는 별명을 가진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이 귀국했다. 그가 스스로를 표현해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기름장어의 영법을 떠올렸다. 긴 몸을 좌우로 이리저리 흔들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기름장어. 인간의 영법으로는 매우 부자연스러운 것임에 틀림없다. 어쩌면 그는 일생동안 기름장어의 영법으로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최대한 자신의 속마음을 내비치지 않고 그 때 그 때 처해진 상황에서 가장 위험스럽지 않은 선택을 하며 방향을 바꾸는 영법. AI 방역을 한다고 하얀 옷을 입고 호스를 휘두르는 모습이나(마스크를 왜 안 쓰셨을까?) 꽃동네를 방문해 누워있는 노인에게 미음을 떠먹이는 모습에서(이번에는 본인이 턱받이를 하셨다) 그리고 승차표를 산다고 2만원을 한꺼번에 우겨넣은 장면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부자연스러움을 본다. 굳이 인간의 영법으로 표현하자면 상체는 접영을 하면서 하늘로 치솟는데 하체는 평형을 하면서 개구리헤엄을 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나와는 일면식도 없는, 게다가 얼마 전까지 세계의 대통령이라는 유엔사무총장을 지낸 분께 이렇게 불경스러운 딴죽을 거는 이유는 그가 귀국 직후 던진 한 마디 때문이다.

‘국민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한 몸을 불사르겠다.’
지난 7일 광화문에서 몸에 불을 붙여 소신공양을 한 정원스님이 있다. 죽음으로 세상에 이야기를 전하려는 몸짓은 약자의 화법이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이 아니고는 도저히 전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을 때 삶을 던져 세상을 향해 딱 한 번 외치는 것이다. 나는 세계의 대통령을 지낸 그가 몸을 불사를 이유도 그럴 필요도 없다고 본다. 오히려 ‘몸을 불사르겠다’는 수사에 숨겨진 권력으로의 욕망은 실제로 몸을 불사를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영혼에 대한 모독이다. 적어도 40년 수영을 하며 체득한 변방에 대한 감각에 의하면 명백히 그러하다.
정용철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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