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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 불을 끄는 게 어떻겠사옵니까(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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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37)

[千日野話] 불을 끄는 게 어떻겠사옵니까(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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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몸뚱이만을 사랑하는 사내가 아니라, 전인격을 귀하게 여기고 재능과 느낌을 알아주고 또 같은 취향과 관심에 즐거워하는 우정을 지닌 남자였다. 기다려주고 또 스스로 기다릴 줄도 아는 배려와 인내의 동행이었다. 이런 분을 만나게 해주신 천지신명께 감사를 드리고 싶었다. 흐르는 눈물을 옷섶으로 찍으며 두향은 전신이 깊이 떨려오는 것을 느꼈다. 엎드린 저쪽에서 바스락거리며 고개를 드는 소리가 날 때 그녀도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일어났다. 퇴계와 두향은 서로에게 달려가 얼싸안았고 이윽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수매를 바라보는 사람과 꽃처럼. 퇴계의 뺨에 두향의 이마가 닿았고, 여인의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가 남자의 코끝에 스쳤다. 남자의 거친 숨결이 여인의 귓속으로 뜨겁게 흘러든다.
퇴계의 손이 두향의 손을 찾았다. 그녀의 손이 살짝 소스라치는 느낌을 느낀다. 하지만 곧 나긋해진다. 등 뒤에서 만난 두 손이 서로를 꼬옥 감싸쥔다. 둘은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손가락과 손바닥에서 나오는 따뜻하고 은근한 기운을 느낀다. 사람의 손을 만지는 일이 이토록 놀랍고 감미로운 것인 줄 두향은 이제껏 몰랐다. 손에 마음이 있고 손에 열정이 있고 손에 존재 전부가 있고 손에 살아온 생애가 담겨 있다. 퇴계의 손을 가만히 쥔다는 것, 만지작거린다는 것, 손이 말하는 이야기를 손으로 듣는다는 것이 이토록 온 생각을 사로잡을 줄 몰랐다. 아, 이것이 사랑이구나.

여인의 몸 위로 움직이던 그의 손이 문득 가슴에 닿았다. 두향의 달아오르는 마음 같은 따뜻한 융기 위에 오래 머물면서 퇴계에겐 오래 잊고 있었던 모성의 아늑하고 평안한 기분이 찾아왔다.

"이 둥근 것을 사람들은 젖무덤이라 부르니, 삶과 죽음이 이 골짜기에 함께 있구나. 자식을 키워내는 성스러운 이것이 사내들의 욕망을 자아내는 불쏘시개가 되니, 참으로 조물주의 뜻이 오묘하다 해야 할 것이다."
"예. 자식을 낳지 않은 여인은, 제 가슴을 다른 사내에게 보이는 것이 더없는 부끄러움이 되니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숨기고 싶은 마음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한꺼번에 들어있으니, 부끄러움 또한 욕망하는 일의 일부임을 알 것 같사옵니다." "땀이 송글송글 맺혔구나."

"불을 끄는 게 어떻겠사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느냐."

퇴계가 일어나 등잔불을 껐다. 사위가 깜깜해지자 숨소리만 들렸다. 실낱같은 매화 향기가 어둠을 타고 스며들어오는 듯하다. 두 남녀는 서로를 더듬어 더욱 깊이 찾아 들어갔다.

이날 밤 퇴계와 두향의 사랑이 어떠했는지 말해줄 수 있는 이는 없다. 다만 나중에 행수기생이 귀띔해주기를, 세상에 퇴계만큼 열정적인 사람은 없을 거라고 두향이 어느날 중얼거리듯 말했다 한다. 행수기생이 캐물었더니 두향은 퇴계가 '소녀경'의 9법 8익 7손에 대해 얘기하였다고 대답했단다.

어떤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가 나왔을지 종잡기는 어렵다. 하지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세상이 허물로 치는 것을 벗고, 허심탄회하게 동침의 공간에서 행해지는 것들에 관한 얘기를 나눴다는 짐작은 가게 한다. 9법 8익 7손은 남녀가 교합을 하는 스물 네 가지 체위에 대해 열거해놓은 것이다. 이 파격적인 소재를 퇴계는 일상의 경(敬ㆍ존경과 배려의 태도)이라는 관점으로 설명했을까.

9법(아홉 가지 법도)은 교과서적인 포즈이다. 대개 짐승이나 새, 물고기, 곤충의 행태를 응용한 것들이다. 제1법은 용번(龍飜)이다. 용이 날고 있는 형상을 떠올리면 된다. 가장 얌전하게 하는 체위인데 여기에 용의 모습을 끌어들인 것은 성(性)의 성스럽고 당당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제2법은 호보(虎步)라 하는데, 호랑이가 걷는 모양이다. 짐승이 몸을 웅크리며 걸어나가는 모습을 원용했다. 제3법은 원박(猿搏)이라 한다. 원숭이가 높은 나뭇가지에 양다리를 걸치는 것과 같은 자세이다. 
<계속>
 
▶이전회차
[千日野話]몸사랑 하기 전에 맞절하는 남녀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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