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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없다 / 김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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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에는 불빛이 없고, 책가방이 없네 다락방에는 종소리 반복이 없고 실내화 발목이 없고 성적표가 없고 청진기 후렴이 없고 교복이 없고 아령이 없네 다락방에는 바구니가 있고 바구니에는 곶감이 있고 곶감에는 감 씨가 있고 감 씨에는 숟가락이 있고 숟가락에는 감나무가 자라고 감나무에는 감꽃이 피고 감꽃을 줄에 꿰면 목걸이가 되고 목걸이는 개 줄, 개 줄에 묶인 귀뚜라미가 짖네

아버지를 회상하는 사물들을 열거하면 채워지는 그 무엇, 열거하지 않으면 채워지는 않는 그 무엇이 다락방에는 있지만 없네 있지만 없는 것. 칼날 자국 선명한 책상, 책상에 음각된 어둠이 어둠을 파내며 새겨진 이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름을 복원했던 목도장 테두리처럼 둥근 주발에는 제삿밥이 없고 그 테두리는 다락방에 있지만 없네 아버지를 현재에 고정시키지 못한 그 무엇, 있지만 없네 아버지를 다른 시간으로 이동시킨 그 무엇이 없지만 있네
다락방에는 북극성이 없고 지킬과 하이드가 없네 다락방에는 술병의 솟구침이 없고 낮달의 환멸이 없고 성경책의 논리가 없고 엄마의 잔소리가 없고, 담배의 조언이 없고, 무지개의 오독이 없고 아홉 시의 환청이 없고 약봉지의 눈물이 없고 나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데 실제로 있어야 할 나도 없고 실제로 있었던 어제의 아버지가 없네 다락방은 있지만 없네 없는 것처럼, 없지만 있는 것처럼, 다락방은 있지만 없네 모두 떠나고, 없네

 
[오후 한詩] 없다 / 김분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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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이 시의 저 깊은 속사정 한가운데에는 시인의 '아버지'가 있는 듯하다. 그런 듯하긴 한데, 나는 그보다 이 시에 적힌 '다락방'이라는 단어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다락'이나 '다락방'이나 실은 같은 공간이긴 하지만, '다락방'은 '다락'을 그런대로 사람이 거처할 만하게 꾸민 상태를 지칭한다. 그리고 예전에 그곳은 주로 부엌이 딸린 단칸방에 세 들어 살던 가족의 사춘기 아이들의 차지가 되곤 했다. 그래서 '다락방'에는 어쩔 수 없이 가난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고, 가빈한 가족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어리고 여린 마음이 유폐되어 있다. "다락방에는 북극성이 없고 지킬과 하이드가 없네 다락방에는 술병의 솟구침이 없고 낮달의 환멸이 없고 성경책의 논리가 없고 엄마의 잔소리가 없고, 담배의 조언이 없고"…. 그러나 또한 그래서 그곳은 온갖 몽상들이 피어오르는 꿈의 공장이었고, 세계 전체와 자신을 격절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자궁 속이 그러했듯이. 오늘은 시인이 선물해 준 그 '다락방'에 들어가 단내 나도록 한숨 자고 오고 싶다.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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