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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사진가 부부, 30년간 전국 522곳 오일장의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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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담양장, 정영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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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순창장, 정영신 作

1988년 순창장, 정영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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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신·조문호 부부, '장에 가자' 사진전 열어

[아시아경제 오진희 기자]눈 내린 전남 담양의 5일장. 손님과 상인들이 이곳의 특산품인 대나무 소쿠리들을 앞에 놓고 흥정을 한다. 1980년대 담양시장을 찍은 흑백사진에서 시장 특유의 활기가 전해진다. 충북 영동장에선 털모자를 쓴 초로의 노인이 자신의 몸집만한 항아리 셋을 몸에 진 채 즐거운 미소를 띠고 있고, 전북 순창장에선 씨암탉을 옆구리에 낀 할아버지가 할머니와 덩실덩실 춤사위를 벌이고 있다. 어느덧 20년이 지나 컬러사진으로 바뀐 2000년대 장터 사진 속에선 프랜차이즈 커피숍 앞에 자신이 가꾼 대파를 내놓고 파는 할머니의 모습이 웃음 짓는 얼굴에도 안쓰러워 보인다. 강원도 정선장의 아주머니들은 지금도 끼니 때가 되자 상인, 손님 할 것 없이 삼삼오오 모여 대충 차린 음식들을 정답게 나누지만, 허리 굽은 할머니가 리어카를 끌고 가는 모습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옛날만큼 사람의 발길이 많지 않은 전국의 많은 장터들은 고단하고 쓸쓸해 보인다.
전국의 5일장 522곳을 30년간에 걸쳐 기록한 사진들에는 추억 속 장터들과 장꾼들의 삶, 장터의 변두리 풍경 등이 오롯이 담겼다. 전국 5일장을 답사한 부부 다큐사진가의 작품들이다. 처음 20년 동안은 정영신(58·여)씨가 자동차도 없이 시골장터를 돌며 기록했고, 나머지 10년간은 조문호(69)씨와 결혼 후 둘이 항상 붙어 다니며 장터를 찍었다. 이때부터는 조씨가 운전수 노릇을 했다. 두 사람은 정씨가 장터를 돌아다닐 적부터 서울 인사동 한 흑백사진동호회를 통해 알게 됐고 조씨의 끝없는 구애에 10년 전인 2005년 늦깎이 결혼식을 올렸다.

원래 정씨는 소설에 쓸 소재를 모으기 위해 장터를 찾았다가 사진을 찍게 됐다. 수시로 시골 장을 찾아 늙은 장꾼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이들과 살가운 대화를 나누면서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갔다. 조씨는 '전농동 588번지' '87민주항쟁' '인사동 사람들' 등 여러 차례 개인전을 연 베테랑 다큐멘터리 사진가다. 조씨는 '장터'를 줄곧 찍어 온 정씨에게 '아예 전국의 5일장을 모두 돌자'고 했고 그렇게 해서 '전국 5일장 탐방 프로젝트'가 성사됐다.
 
정영신, 조문호 부부

정영신, 조문호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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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인사동 한 커피숍에서 만난 이들 부부는 늘 발로 전국을 누비는 이들이라선지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서로 닮아 있었다. 이들은 매일 같이 새벽 3~4시면 서울 은평구 녹번동 자택에서 출발해 지방으로 내려갔다고 한다. 정씨는 "새벽 장은 6시면 개시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서둘러야 한다"며 "오전에 촬영을 끝내면 두유 한 개, 떡 한 개씩으로 점심을 때우고 가까운 장터로 이동하는 것이 다반사였다. 먼 곳은 2박3일간 5개 장을 돌기도 했다"고 말했다.

정씨에게 시골 장은 '노인들의 잔치마당'이었다. "장에서 함께 만나고, 인근 버스정류장에서 친구도 기다리고 하는 게 어르신들의 소소한 생활이죠. 이분들은 돈 벌려고 장에 나오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들이지만 스스로 푸성귀라도 밭에 심어 용돈이라도 버는 것에 자긍심이 커요. 그 돈으로 손자들 용돈도 주고, 새벽 장 마치면 병원도 다녀와요." 그는 "지금은 마트가 많이 생겨서 장꾼들이 서너 명밖에 남지 않은 곳들도 있다"고 아쉬워했다. 조씨는 이런 정씨를 두고 "마누라는 완전히 개털이다. 나는 신용불량자다. 그런데 할머니하고 얘기하다가 자기가 필요하지도 않는 걸 산다"며 웃음을 지었다. 그런 남편의 장난기 어린 말에 정씨는 "할머니가 장에 나와 차비도 못 벌어 가면 너무 미안해서 그런다"고 얘기했다.
 
2013년 해남송지장, 조문호 作

2013년 해남송지장, 조문호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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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영천장, 정영신 作

2010년 영천장, 정영신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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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상대방의 사진을 어떻게 평가할까. 조씨는 "다큐는 객관적으로 찍어야 한다지만, 실상 주관을 따라간다. 이 사람은 사람들이랑 소통하는 것에 능하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정씨의 사진들은 감성적이며 푸근한 인간미가 넘치는 것들이 많다. 조씨의 사진은 장터에 드리운 그늘과 쓸쓸함이 느껴진다. 정씨는 남편에 대해 "나보다 사진에서는 훨씬 위라고 생각한다"며 "588사진부터 민주항쟁까지 그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작업할 수 있었다는 게 대단하다"고 칭찬했다.
"소외된 곳에 눈길을 돌려 함께 볼 수 있게 하는 것." 부부는 '다큐 사진'을 이렇게 정의했다. 이들 부부의 전국 5일장 사진은 오는 21일부터 서울 인사동 아라아트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장에 가자'라는 제목으로 열리는 사진전과 함께 '정영신의 전국 오일장 순례기' 사진 에세이집도 출간된다. 다음 달 17일까지 지속되는 전시기간 동안 이들 부부는 전시장 입구에 간이 스튜디오를 설치해 매일 오후 1~5시 관람객 모두에게 초상사진을 무료로 촬영해주기로 했다.

앞으로 정씨는 서울에 있는 재래시장을 모두 찍는 것이 목표다. 그리고 과거에 찍은 장터의 흑백사진들 중 슬라이드로 찍은 것들을 컬러로 복원해 문화사적인 측면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 볼 생각이다. 조씨는 1990년 열었던 전시 '청량리 588'의 사진집을 다음 달에야 비로소 출간한다. 초상권 문제도 있었지만, 천대받는 여성들의 삶을 기록한 작업을 당시 언론들이 선정적으로 보도하면서 원래 취지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해 사진집 출판을 그동안 미뤘던 탓이다. 그리고 30년 동안 지속해 온 '인사동' 사진 작업을 계속해 가며 추후 사진전을 개최할 계획이다. 



오진희 기자 valere@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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