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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고립24시]3년간 햇반·라면 먹고 종일 게임만…불안 심해지면 결국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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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아시아경제가 만난 고립·은둔 청년들
④은둔 청년 3인이 전한 '그 날' 이야기
친구·지인과 교류 끊어…가족과도 단절
불규칙한 하루 패턴에 식사도 거르는 날 많아
죽음을 고려·시도하기도

편집자주
퇴근 후 혼자 끼니를 때울 때, 휴대폰에 저장된 연락처는 수백개지만 힘든 일이 있어도 마음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을 때, 아프거나 돈이 없는데 도움을 요청할 수 없을 때…. 아시아경제가 만난 20·30대 청년들은 이럴 때 고립감을 느꼈다고 털어놨습니다. 혹시 당신의 이야기는 아닌가요? '히키코모리', '은둔형 외톨이'와 같은 단어가 나와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왔다면 이제는 고립·은둔을 다시 제대로 바라볼 때입니다.
사회활동을 완전히 끊고 집이나 방에 갇히는 '은둔'은 한순간에 찾아오지 않는다. 가랑비에 젖듯 스며든 일상 속 고립이 쌓이고 쌓여 심각한 은둔 상태에 놓이는 청년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인간관계가 서서히 줄고 어려운 상황에 놓여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상대가 사라지는 고립에서 한발 더 나아가 사회 활동을 멈추고 스스로 집이나 방처럼 제한된 공간에 가두게 되는 은둔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시아경제가 만난 20·30대 은둔 청년들 역시 "처음엔 알 수 없는 무기력함이 일상을 짓누르다, 점점 집 안에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고 입을 모았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고립·은둔 청년 3800여명의 일상을 조사한 실태조사에 따르면 이들에게는 세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최근 2주간 친구나 가까운 지인과의 교류 없음'(28.7%), '불규칙한 식사 생활'(72.4%), '죽음을 고려함'(75.4%)이다.


[청년고립24시]3년간 햇반·라면 먹고 종일 게임만…불안 심해지면 결국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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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낮 구분 못 해…타인과의 교류 단절

2012년 6월부터 1년6개월 가량 은둔 생활을 한 권현우씨(38)도 이러한 경험을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외교관이 꿈이었던 권씨는 2012년 여름, 외무고시 합격의 꿈을 안고 2평 남짓한 신림동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권씨가 번번이 받아들인 건 불합격 증서였다. 탈락이 계속되며 가장 먼저 끊은 건 가까운 친구, 지인들과의 연락이었다. 잘 지내냐는 친구들의 연락에 권씨는 굳이 답장하지 않았다고 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외무고시에 붙겠다고 말하고 다녔어요. 그런데 시험에 번번이 떨어지면서 더 이상 나라는 사람을 내세울 게 없어진 거죠. 내 존재가 희미해지는 느낌이었어요."


가족과의 교류도 거의 끊었다. 일주일에 한 번 '공부는 잘하고 있냐'며 부모님의 안부 연락을 받았지만, 그때마다 '잘하고 있다'고 답장하는 게 전부였다. 권씨는 "당시 무기력증으로 거의 공부를 하지 못했는데, 부모님은 내 상황에 대해 거의 모르고 있었다"며 "실패를 주변에 알리는 것이 싫어 타인과의 모든 연락을 끊었고, 집 안에서만 혼자 생활했다"고 회상했다.


권현우씨[일러스트=이영우 기자]

권현우씨[일러스트=이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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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3월부터 3년간 은둔 생활을 한 나인채씨(28)도 상황은 비슷했다. 나씨는 진로 문제로 부모님과 갈등을 빚고 방에 자신을 가뒀다. 은둔 당시 밤을 새우며 아침 7시까지 게임을 하다가 오후 3~4시께 일어나는 생활을 반복했다고 한다. 식사는 눈을 떴을 때 배가 고프면 먹었지만, 그렇지 않으면 걸렀다.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은 날도 있었다. 온라인 플랫폼에서 대량 구매한 햇반과 라면이 나씨의 주된 메뉴였다.

"밤낮이 완전히 뒤바뀐 생활을 했어요. 질릴 때까지 게임을 하다가 아침에 잠들면 눈을 떴을 때 이미 해가 져 있었어요. 끼니는 주로 SNS(사회관계망서비스)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얻은 음식이나 기프티콘, 온라인에서 대량 구매한 가공식품으로 때웠죠."

나인채씨[일러스트=이영우 기자]

나인채씨[일러스트=이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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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과의 단절, 불규칙한 생활에 이어 찾아온 것은 '정서적 불안감'이었다. 불안 증상이 심해지면서 은둔 청년들은 죽음을 진지하게 고려하거나, 시도하는 데 이르곤 한다. 복지부 설문조사에서 고립·은둔 청년 응답자 10명 중 7명 이상이 죽음을 생각했고, 시도한 경험이 있는 경우도 4명 중 1명꼴로 적지 않았다. 고립·은둔 기간이 길수록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거나 시도하는 비율도 증가하는 양상을 보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아버지, 누나와의 불화로 21살부터 고시원에서 혼자 생활한 장영걸씨(25)는 3년6개월간의 고립 생활 중 실제 죽음 문턱까지 갔다. 가족들을 피해 집을 나와 인근 고시촌으로 도망쳤지만,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우울증과 공황증세가 심해졌다. 장씨는 문득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털 사이트와 온라인 커뮤니티에 접속해 '안 아프게 죽는 법' 등을 검색했다고 한다.


"지옥 같던 집을 나와서 혼자 살 수 있다 보니 처음엔 고시텔이 평화롭고 좋았어요. 그렇지만 외출을 안 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우울증, 공황장애, 대인기피증 같은 증상이 생기더라고요. 나중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실제로 시도한 적이 있어요."

장영걸씨[일러스트=이영우 기자]

장영걸씨[일러스트=이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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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무고시에서 연일 낙방해 은둔 생활을 했던 권씨도 사실 죽음을 생각했던 경험이 있었다. 고시를 포기하고 국회의원 수행비서로 일하던 시기에 차를 몰고 한강을 지나던 중 문득 '펜스를 들이받고 강물에 빠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깜짝 놀라 찾아간 정신건강의학과 의사는 권씨에게 "왜 이제 오셨냐"고 첫마디를 건넸다. 그날 권씨는 우울증을 진단받고 약을 처방받았다.


"의사가 증상을 듣더니 '왜 이제 오셨어요'라고 묻더라고요. 내가 우울증을 앓고 있는지도 몰랐어요. 그새 병을 키우고 있던 거죠. 병원에 진작 갔어야 했는데 내가 아픈지도 모르고 살았어요."


비 내리는 주말 밤 경기도의 한 도서관에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비 내리는 주말 밤 경기도의 한 도서관에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다. [사진=허영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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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은둔 버티게 한 건 사람 아닌 물건

2~3평 남짓한 좁은 방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이들에게 위안이 된 물건은 무엇이었을까. 수년간 방 안에 갇혀 지냈던 은둔 청년 3인은 '은둔 당시, 내게 가장 소중했던 물건을 소개해 달라'는 아시아경제의 물음에 저마다의 사연과 함께 답변을 보내왔다. 이들은 은둔 기간 중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하던 속마음을 각자의 방식으로 풀고 있었다. 그 창구가 고립·은둔 생활을 버티게 한 원동력이자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고 청년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권씨는 외무고시 준비 시절,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자 시작한 취미 생활인 '네컷만화'를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답답한 마음에 펜을 잡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지만, 매번 어둡고 우울한 생각이 종이를 메우는 것이 싫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울한 현실을 글보다 훨씬 재밌고 가볍게 풀어낼 수 있는 만화의 매력에 빠졌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면의 생각들을 많이 끄집어낼 수 있었고, 마음의 위로를 받았어요. 은둔 당시 살아낼 수 있는 동력이었어요."


권현우씨가 그린 '네컷만화' [사진제공=권현우]

권현우씨가 그린 '네컷만화' [사진제공=권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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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을 좋아하던 나씨에겐 '스마트폰'이 외부로 통하는 유일한 소통 창구였다. 은둔 당시, 하루 중 유일하게 타인과 소통하는 시간은 게임 커뮤니티에 접속해 같은 팀 유저들과 대화할 때였다.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이들이지만, 공통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면 조금이나마 살아있는 기분이 느껴졌다고 했다.


장씨에겐 은둔 당시 사용하던 '무선 키보드'가 가장 특별했다. 장씨는 남들에게 쉽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가정사와 부모님과의 갈등, 우울한 속마음을 일주일에 2~3번씩, A4용지 한 페이지 분량으로 쓰며 털어냈다.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끄적이다 보면 불안했던 마음도 많이 누그러졌다. 장씨는 "방 안에서 생각을 정리하려고 에세이를 쓰기 시작하면서 '지금 내 기분이 이렇구나'하는 걸 스스로 많이 깨닫게 됐다"며 "처음엔 '왜 나 빼고 다 잘 나가지'라는 부정적인 내용이 가득했는데, 나중엔 점점 나아지더라"고 말했다.


은둔 당시 나인채씨가 사용하던 핸드폰(왼쪽)과 장영걸씨가 사용하던 무선 키보드(오른쪽)[사진제공=나인채, 장영걸]

은둔 당시 나인채씨가 사용하던 핸드폰(왼쪽)과 장영걸씨가 사용하던 무선 키보드(오른쪽)[사진제공=나인채, 장영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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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희 기자 daw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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