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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며 생각하며]달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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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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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달리기라는 단어에는 이 행위와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는 신체부위, 다리가 숨어있다. 다리에 'ㄹ'을 붙이면 '달리'게 된다. 리을과 리을이 연달아 붙어있는 모양은 지면을 박차고 땅 위를 흐르는 날렵한 주자를 떠오르게 한다. 두 다리를 빠르게 움직여 동시에 양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해야 비로소 달리기가 시작되는데 만약 두 다리 중 하나가 지면과 붙어있다면 그 동작은 아직 걷기일 뿐이다. 걷기와 달리기의 접점에 경보가 있다.

달리기는 근본적으로 빠름에 도전하는 스포츠다. 일정한 거리를 정해 놓고 가장 빨리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까지 자신의 몸을 옮기는 자가 승리하는 경기다. 가장 짧은 거리를 달리는 경기는 100미터이고 가장 긴 거리를 달리는 경기는 마라톤이다. 100미터는 10초 남짓이면 승부가 갈리는 반면 마라톤은 두 시간이 훌쩍 넘어야 주자가 멈추어 설 수 있다. 스포츠라는 이름으로 빠름에 도전하는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두 형태다.
김국영은 100미터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빨리 달리는 사람이다. 10초07. 지난 6월 27일 강원 정선종합운동장에서 열린 코리아오픈 국제육상대회 남자 100m 결승에서 그가 세운 한국신기록이다. 2010년 당시 열아홉이던 김국영은 31년 동안 아무도 범접치 못하던 고(故) 서말구 선수의 기록 10초34를 10초31로 앞당겼다. 이후 7년 동안 그는 10초23, 10초16, 10초13, 그리고 10초07까지 대한민국의 한계를 천천히 그러나 끈질기게 밀어 붙이고 있다.

우리가 먹고 마시고 떠들며 일상을 흘려보내고 있는 동안 나와 같은 국적을 가진 누군가가 부단히 자신의 한계(이자 대한민국의 한계)를 100분의 1초라도 줄이기 위해 온몸을 던져 단련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의 외롭고 단호한 고행에 대해 일종의 경외심을 느낀다. 두 달 후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육상선수권 대회에 출전하는 김국영은 9초대에 진입하는 최초의 한국인이 되길 희망하고 있다.

김국영이 자신의 신기록을 갈아치우고 포효하던 바로 그 날 대한민국 육상계의 거목 서윤복 대한육상연맹 전 고문이 타계했다. 육상의 한 극단인 100m에서 얻은 신기록으로 즐거워하던 날 다른 극단인 마라톤에서 전해온 비보다. 1947년 4월 19일 당시에는 올림픽을 제외하고는 유일한 마라톤 대회인 보스턴 마라톤에서 2시간 25분 39초(세계신기록)로 우승했던 그다.
동아대 정희준 교수가 쓴 스포츠코리아판타지를 보면 이 당시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한 서윤복, 동행했던 손기정, 남승룡이 겪었던 웃지 못 할 일화들이 소상히 적혀있다. 미군정 시절 국민들이 모금을 통해 마련한 여비로 어렵게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를 거쳐 보스턴까지 가면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하와이에서 연습을 한다고 나간 서윤복과 남승룡이 길을 잃자 이들을 찾아 나선 손기정까지 길을 잃어 경찰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 샌프란시스코 군용기에서 덜렁 내려 뉴욕까지 가는 비행기를 찾아 동동거렸던 이야기, 그리고 경기도중 개가 달려들어 발로 차고 넘어져 2등이 되었다가 레이스를 이어가 우승한 이야기까지. 서윤복의 우승은 일제로부터 독립 후 남과 북, 진보와 보수가 대립해 혼란했던 시기에 쏟아진 단비와도 같은 쾌거였다. 백범 김구 선생은 발로 세계를 재패했다는 의미를 담아 '족패천하(足覇天下)'라는 휘호를 써 감격을 전했다.

두 다리를 움직여 자신의 한계를 밀어붙이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숨 가쁘지만 늘 아름답다. 오랜만에 스스로를 러너라고 부르는 마라토너 하루키의 소설을 다시 읽어야겠다.  

정용철 서강대 교육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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