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오후 한詩] 언니 같은/박인옥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언니는 용해 빠졌다
 어쩔 수 없이 내가 게으름을 피우는 날에도
 나를 나무라지 않는다
 씽크대가 서너 번 넘쳐 나는 우리 집 한 끼 설거지
 저녁 설거지를 못 한 이튿날 새벽
 언니는 일어나 그 많은 부엌일 다하고
 끓어 넘친 음식 딱지 얼룩덜룩했던 가스렌지도
 반짝거리도록 닦는다

 내가 앓느라 노란 얼굴로
 이른 저녁부터 깊이 잠들던 때
 언니는 따뜻한 물로 아이들 발을 닦아 주었나 보다
 어느 날 큰아들이 엄마 발 닦아 주는 체험을 마치고
 내가 뿌듯해하자
 아빠는 매일 우리들 발을 닦아 주셨어요
 네 명의 동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잘 다려진 교복 세 벌이 가지런히 걸려 있고
 다섯 뭉치의 아이들 옷이 높은 건물처럼 개켜져 있다
 막내가 입고 뒹구는 잠옷이 구김 없이 반들거리는 걸 보면
 또 언니가 어느새 다려 놓은 거다
 휴일 내내 언니는 다림질하느라
 화장기 없는 얼굴에
 수염이 자라 덥수룩하다
 베란다 끝에 서서 끝없는 집안일을 다 털어 낸 듯
 담배 한 대 피우는 당신
 좋은 언니 같은

 
[오후 한詩]  언니 같은/박인옥
AD
원본보기 아이콘
 어떤 시는 참 다정해서 읽는 일만으로도 흐뭇해질 때가 있다. 이 시가 그렇다. 금방 알아챘겠지만 이 시에 등장하는 "좋은 언니"는 남편이다. 설거지도 군말 없이 척척 하고, 아이들 발도 매일매일 닦아 주고, 교복도 잠옷도 잘 다리는 그런 남편 말이다. 그런 남편이라면 "베란다 끝에 서서" "담배 한 대 피"운들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 또한 사랑스러워 보일 것이다. 이 시의 행간마다 적혀 있는 장면들은 너무너무 행복해 보여 실은 살짝 심통이 날 정도다. 그런데 더할 나위 없이 다감한 이 시를 읽으면서 새삼 배우는 점은 '낯설게 하기'의 미덕이다. '낯설게 하기'의 뜻은 축자적 의미 그대로인데, '낯설게 하기' 위해서는 일단 대상을 낯설게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즉 '남편'을 '남편'의 맥락에서 떼어 놓고 마치 처음 만난 사람인 듯 유심히 바라본 결과가 이 시의 첫 문장이고, 이 시를 이끌고 있는 핵심 기제인 셈이다. 시는 그러니까 어디 저 멀리에 있는 게 아니라 다만 그저 슬쩍 다르게 보려고 마음을 먹는 순간 어느새 우리 곁에서 반짝이는 그런 것이다.
채상우 시인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곰도 놀라고 우리도 놀랐어요"…지리산서 반달가슴곰 '불쑥' 지역비하에 성희롱 논란까지…피식대학 구독자 300만 붕괴 강형욱 해명에도 전 직원들 "갑질·폭언 있었다"…결국 법정으로?

    #국내이슈

  • 안개 때문에 열차-신호등 헷갈려…미국 테슬라차주 목숨 잃을 뻔 "5년 뒤에도 뛰어내릴 것"…95살 한국전 참전용사, 스카이다이빙 도전기 "50년전 부친이 400만원에 낙찰"…나폴레옹 신체일부 소장한 미국 여성

    #해외이슈

  • [포토] 시트지로 가린 창문 속 노인의 외침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다' [포토] 수채화 같은 맑은 하늘 [이미지 다이어리] 딱따구리와 나무의 공생

    #포토PICK

  • 현대차, 中·인도·인니 배터리 전략 다르게…UAM은 수소전지로 "없어서 못 팔아" 출시 2개월 만에 완판…예상 밖 '전기차 강자' 된 아우디 기아 사장"'모두를 위한 전기차' 첫발 떼…전동화 전환, 그대로 간다"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거대언어모델(LLM)' 개발에 속도내는 엔씨소프트 [뉴스속 용어]급발진 재연 시험 결과 '사고기록장치' 신뢰성 의문? [뉴스속 용어]국회 통과 청신호 '고준위방폐장 특별법'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