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im영역

[오후 한詩]빗금의 온도/심재휘

스크랩 글자크기

글자크기 설정

닫기
인쇄 RSS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 바라보는
 아현동은 봄비 오는 밤이었다
 큰길가에는 큰길을 따라 급한 경사로가 있어서
 가파른 오르막 축대가
 높은 어둠 속으로 스며드는 밤이었다
 가로등의 젖은 불빛을 몸에 쓰며
 벚꽃들도 옆으로 흩날리며 떨어져
 내리막으로 비스듬히 흘러내리는 것이 벚꽃인지
 봄비인지 아니면 또 하루였는지 알 수 없어서
 미끄러운 빗금들 위를 몸을 곧게 세워 오르던 사람
 가파른 축대를 따라 사실은 엎어질 듯 오르던 사람
 빗물도 옛날 같은 아현동이었다
 비 묻은 차창에 가슴이 높게 고인 아현동을,
 없는 동네인 듯 아현동을 빗속에 두고
 버스는 곧 비 그칠 것 같은 광화문으로 향하는데
 우산도 없이 언덕을 올라가던 사람은
 이내 집에 들었으리라만
 빗금의 풍경은 번지고 번져서
 한동안 지워지지 않을 봄비 오는 밤이었다
 빗금에도 슬픔의 온도가 서리던 아현동이었다
 ----------
아현동에서 살아 본 적은 없지만 시인처럼 가끔 버스를 타고 지나치다 바라보았던 그곳은 내가 어린 시절 한때 살았던 삼양동처럼 달동네였다. 어디 아현동, 삼양동뿐이랴. 신림동, 봉천동, 중곡동, 사당동 등등 도시 곳곳에 소담스럽게 맺혀 있던 그 동네들, 달빛을 가장 먼저 마중 나가던 높디높은 산꼭대기에 있어 달동네라고 불렸던 동네들, 이름이야 한없이 정겹지만 실은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길 마디마디가 비 오는 저녁보다 깊어 한없이 폭폭하기만 했던 동네들, "빗금에도 슬픔의 온도가 서리던" 동네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더듬어 보면 그 동네들이야말로 "슬픔의 온도"를 사무치게 겪었고 그래서 서로를 껴안을 줄 알았고 그런 마음으로 아이들을 오손도손 나누어 키워 오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도시의 태반은 어쩌면 달동네였던 셈이다. "우산도 없이 언덕을 올라가던 사람"들이 저 광화문 앞으로 다시 모여드는 까닭이다.

채상우 시인



AD

함께 본 뉴스

새로보기

이슈 PICK

  • "곰도 놀라고 우리도 놀랐어요"…지리산서 반달가슴곰 '불쑥' 지역비하에 성희롱 논란까지…피식대학 구독자 300만 붕괴 강형욱 해명에도 전 직원들 "갑질·폭언 있었다"…결국 법정으로?

    #국내이슈

  • 안개 때문에 열차-신호등 헷갈려…미국 테슬라차주 목숨 잃을 뻔 "5년 뒤에도 뛰어내릴 것"…95살 한국전 참전용사, 스카이다이빙 도전기 "50년전 부친이 400만원에 낙찰"…나폴레옹 신체일부 소장한 미국 여성

    #해외이슈

  • [포토] 시트지로 가린 창문 속 노인의 외침 '지금의 나는 미래의 너다' [포토] 수채화 같은 맑은 하늘 [이미지 다이어리] 딱따구리와 나무의 공생

    #포토PICK

  • 현대차, 中·인도·인니 배터리 전략 다르게…UAM은 수소전지로 "없어서 못 팔아" 출시 2개월 만에 완판…예상 밖 '전기차 강자' 된 아우디 기아 사장"'모두를 위한 전기차' 첫발 떼…전동화 전환, 그대로 간다"

    #CAR라이프

  • [뉴스속 용어]'거대언어모델(LLM)' 개발에 속도내는 엔씨소프트 [뉴스속 용어]급발진 재연 시험 결과 '사고기록장치' 신뢰성 의문? [뉴스속 용어]국회 통과 청신호 '고준위방폐장 특별법'

    #뉴스속OO

간격처리를 위한 class

많이 본 뉴스 !가장 많이 읽힌 뉴스를 제공합니다. 집계 기준에 따라 최대 3일 전 기사까지 제공될 수 있습니다.

top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