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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한詩] 비정규적 슬픔/안숭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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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는 유학도 보내 주지 못했다고 말했다, 데리다는 세 문장을 읽으면 시를 쓸 시간을 준다, 혼자 사는 열대어처럼, 고요하게 늙는 형광등처럼, 느리게 커피가 시간을 젓자 밤이 잔 안에서 잔잔해진다, 어둠들이 삐걱대는 소리를 적을 수 있게 됐다, 거실로 출근하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날들 동안, 웃자란 아가는 아버지 대신 정규적으로 밥을 먹었다, 저녁밥을 건너뛰고 내뱉는 농담은 월급보다 재미가 없었고, 포기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이런 시간들로 나를 당기는 힘을 지울 수 있을까, 가령 고시원 끝 방에 두고 온 휴대폰에선 첫사랑 연락처가, 함부로 쌓아 둔 책 어느 페이지에선 첫 직장 약도가, 살아 있어서 기쁘다와 살수록 슬프다 사이에 서 있는데, 다가갈 수 없는 반대편은 쉬이 휘발된다는데, 아들이 코와 자기 생애를 곯기 시작한다, 반환된 서류 상자를 던져 놓자 어느덧 데리다의 세 문장 길이로 새치가 자라 있다, 베란다의 선인장은 집 안 공기와 익숙한 여자의 완숙한 연민을 찔러 댄다, 어제 받은 부고를 떠올리자 받지 못한 사랑의 남은 몫이 울어 댄다, 읽던 페이지를 서쪽으로 접는다, 안방에서 먼저 잠든 여자가 그쪽으로 따라 눕는다, 진짜 날카로운 풍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밤에서 숨죽이고, 거실 TV는 무음으로 예의를 갖춘다, 오디션 프로에서 탈락한 소녀가 자기 울음에 뼈마디를 세운다, 안방이 너무 멀다고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까, 바람의 정권이 겨울에서 실각하는 내일이 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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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 이젠 슬픔도 비정규적인 시절이다. 어디 슬픔뿐이겠는가. 기쁨도 그렇고 울분도 그렇고 연애도 친구도 심지어 가족도 온통 비정규적이다. 비정규적으로 겨우겨우 입사하고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비정규적으로 퇴사당하고 또다시 비정규적으로 생계를 걱정해야 하고 해도 달도 비정규적으로 떴다가 지는 듯하고 잠도 비정규적으로 들고. 데리다를 읽는 사람도 그렇고 바코드를 찍는 사람도 그렇고 서류를 뒤적이는 사람도 등짐을 지는 사람도 그렇긴 매한가지다. "거실로 출근하고 안방으로 퇴근하는" 사람들, 그러함에도 "포기되지 않는 것들 때문에 석양은 여전히 아름다웠다"고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 "살아 있어서 기쁘다와 살수록 슬프다 사이에 서 있는" 바로 당신과 나, 우리들. 어쩌면 "진짜 날카로운 풍경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심연엔 결코 바닥이란 없다. 오늘 밤 "안방이 너무 멀다". 그런데 도대체 이 나락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어느 누가 이 지옥을 만들었는가.

채상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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