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기획, 사람으로 보는 금융사회학④"1원 때문에 멱살잡혀"…"순서 지켜달라" 부탁했다 현금 신용카드로 맞기도
[아시아경제 구채은 기자] "출근할 때 쓸개는 집에 두고와! 그게 은행원의 숙명이야."
한국은행이 발표한 6월 기준 시중은행의 기업ㆍ가계 여수신 잔액은 2622조(속보치)에 이른다. 이런 어마어마한 돈을 만지는 은행원은 그러나 스스로를 감정노동자로 평한다. 고객 '만족'→고객 '감동'→고객 '감격'→고객 '밀착'→ 고객 '감탄'→고객 '초감탄' 등 날로 진화하는 은행 슬로건은 고객 서비스에 매달리는 은행원의 숙명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에 고객 서비스를 평가하기 위해 손님으로 가장하는 본사의 '모니터요원'(직원들은 이를 암행어사로 부른다)과 지점 곳곳에 달린 CCTV까지 첩첩산중이다.
B은행 충무로 지점에서 일하는 박수연(33·가명)씨는 얼마 전 겪은 일을 생각하면 분통이 터진다. 연휴 전 창구가 혼잡한데 줄을 서지 않고 다가온 고객에게 '순서를 지켜달라'고 하자 "대기하느라 귀향 버스를 놓쳤다"면서 박씨의 얼굴에 통장과 현금카드가 날라온 것이다. 은행 입사 6년차이지만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사직서를 쓰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다. 박씨는 "막무가내의 고객을 응대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본사에서 나오는 암행어사와 지점 곳곳에 설치된 CCTV도 심리적으로 위축시킨다"고 토로했다.
고객만이 아니다. 은행원의 또다른 '상전'은 검사권한을 쥔 금융감독원이나 금융위원회다. D은행 대외협력실 김 모 부장은 "과거 재무부(지금의 기획재정부) 과장 앞에서 시중은행장들이 차렷 자세로 앉아 꼼짝 못했던 일화는 유명하다"며 "지금이야 시대가 달라졌지만 은행원들에게 금융당국 직원은 여전히 무서운 신과 같은 존재"라고 귀띔했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바뀐 부분도 있다. 대부분의 은행은 이때 대기 의자를 스톨(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소형 의자)로 교체했다. 고객 회전율을 높이겠다는 의도였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해서 고객들의 쉼터로 이용되던 '은행 피서'의 풍경도 사라졌다. 번호표를 도입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참 지점장들은 은행원은 '감정노동자' 이상의 역할, 은행은 '금융기관' 이상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사람들이 어울리는 '광장'으로써의 역할이다. E은행 지점장은 "모바일 시대에 은행도 효율성을 강조하지만 은행 지점을 지역 커뮤니티처럼 친근한 장소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그런 역발상이 은행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도 있다"는 희망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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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채은 기자 faktum@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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