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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로에서]나는 전략이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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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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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위대한 인물이 되고자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이름을 '대영'이라고 바꿔달라고 부모님께 졸랐다. 내 이름의 '소'는 작을 '소'자가 아니지만 어감이 아무래도 작은 느낌을 주어서 싫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어디선가 위대한 인물은 큰 도시나 시골이 아닌 소도시에서 나온다고 듣고는 어머니한테 내가 살던 도시가 대도시인지 소도시인지 여쭤보았다. 어머니는 서울 같은 대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주 작지도 않으니 중도시쯤 되지 않겠냐고 해서 무척 실망했다.

크고 원대한 것에 대한 욕심은 중ㆍ고등학교를 지나면서 점점 사라졌다.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대학원 공부와 유학, 구직까지 돌이켜보면 입학지원서든 채용원서든 심지어 논문이든 보고서든 문제는 큰 얘기에 얼마나 제대로 된 디테일을 담아낼 수 있느냐였다.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UCLA 앤더슨 경영대학원의 리처드 러멜트 교수의 책 '전략의 적은 적이다'에는 제대로 된 전략은 구호가 아니라 디테일임을 보여주는 사례가 여럿 나온다. 한 예로 1990년대 초 걸프전에서 사막의 폭풍 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끈 노먼 슈워츠코프 장군은 걸프전의 승리를 "사담 후세인 퇴치니 중동의 민주주의 이행이니 하는 구호성 전략이 아니라 치밀한 보급과 물류계획 덕택"이라고 회고했다.

당시 보급작전을 담당한 파고니스 병참사령관 역시 '산을 옮겨라'라는 책에서 걸프전 승리의 관건은 무려 30개국 출신의 70만 다국적군이 사막에서 작전을 펼치기 위해 어느 부대가 언제 어디서 정확히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파악하고 이를 하나하나 차질 없이 챙겼던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군사학에서 유명한 명제가 나온다. "아마추어는 전략을 논하고, 프로는 병참을 논한다."

또 다른 예는 아폴로계획이다. 흔히 과학기술정책에서 아폴로계획은 최고 정치지도자가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추진력 있게 국가 자원을 투입하여 전무후무한 과학기술적 성과를 이뤄낸 예로 알려져 있다. 그 유명한 케네디 대통령의 1961년 의회 연설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인류의 프런티어 정신을 고양하고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과학기술 투자를 촉구하는 카리스마적 호소로 유명하다. 그러나 러멜트에 따르면 아폴로계획은 대단히 현실적이었고 목표 역시 근접적인 계획이었다. 소련의 스푸트니크 발사로 우주경쟁에 뛰어든 미국이 그냥 그보다 더 큰 목표를 던지고 쫓아간 것이 아니라 미국의 로켓 기술과 자원에 대한 전문가의 정확한 판단을 기반으로 "이길 수 있는" 경쟁을 제안한 것이었다.
실제로 나치 독일에서 로켓을 개발하고 미국으로 귀화한 베르너 폰 브라운 박사가 당시 린든 존슨 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대형로켓 기술을 감안하면 소련이 달에 무인 우주선을 먼저 착륙시킬 가능성이 높으나 달에 '사람'을 보내는 경쟁은 기술만이 아니라 대규모의 사회적 자원이 투입돼야 하므로 미국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은 이 편지를 받은 후 딱 한 달 뒤 이뤄진 것이다.

총 40만명이 10여년에 걸쳐 투입된 이 계획은 사실 과학기술 프로젝트라기보다 대규모 조직경영 실험에 더 가깝다. 생각해보면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D데이를 기점으로 소급해서 기술을 개발하고 로켓을 만들고 우주인을 훈련시키기 위해 정확히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마어마한 디테일을 조율하는 과정이 아니었겠는가.

2014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과학기술 분야 중장기 계획은 미래창조과학부 39개, 산업통상자원부 24개, 농림축산식품부 15개 등 19개 중앙행정기관에 총 116개가 존재한다. 지난 몇 년 동안 이 중 3, 4개 계획 작성 과정에 자문으로 참여했는데 대부분 전략적 방향이나 핵심어를 두고 큰 얘기만 했다. 정작 제대로 된 디테일을 가져간 적이 있었는지 반성하는 중이다.

김소영 카이스트 과학기술정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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