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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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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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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다시 한 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 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우리는 지나쳐온 아직도 어느 갈피에선가 흔들리고 있을 아득한 그 거리들. 나는 언제나 너이고 싶었고 너의 고통이고 싶었지만 그러나 나는 다만 들이키고 들이키는 흉내를 내었을 뿐이다. (중략) 언젠가 다시 한 번 너를 만나러 가마 언젠가 다시 한 번 내 몸이 무덤에 닿기 전에. (이 세계의 어느 낯선 모퉁이에서 네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시인 최승자가 쓴 '언젠가 다시 한 번'이다. 원래 연과 행이 있으나 이어 썼다. 그의 시집 〈즐거운 일기〉에 실렸다. 장석주는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에서 여러 필자를 인용해 최승자의 시를 정리하였다. 그것은 '사랑받지 못한 사람의 고통스러운 신음'(김현), '근원 상실을 생래적 조건으로 받아들이고'(정과리) 있으며 '세계로부터 자신을 유폐시키는 부정성의 언어를 밀고 나감으로써 그러한 세계의 오염을 견뎌 내려는 고독한 자의식에 붙들려'(이광호) 있다.
 최승자는 〈즐거운 일기〉 말고도 시집을 여럿 냈다. 그러나 그의 시 정신을 선명히 드러낸다는 점에서 1984년 12월에 나온 이 시집을 넘어설 것이 없다. 최승자가 꼭꼭 눌러 쓴 '거리'는 사금파리가 되어 오랫동안 잊거나 지우기 위해 노력한 기억의 편린을 끄집어내고 상처를 벌려 선명한 고통을 되새기게 한다. 이 고통은 비명조차 지르기 어려울 만큼 핍진하다. 그래서 김영태가 김수영을 추모할 때의, 너무나 감미로워 슬픔조차 우아한 경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구현한다.

 '김수영을 추모하는 저녁 미사곡'에서 김영태는 달콤하게 노래한다. '무덤은 멀다 노을 아래로 노을을 머리에 이고 타박타박 낙타처럼 걸어간다'고 했을 때 '타박타박'은 왈츠의 스텝 같아서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 사막을 떠오르게 하지 않는다. '내가 그대에게 줄 것은 식지 않은 사랑뿐이라고 걸으면서 가만히 내 반쪽 심장에 끓이는 더운 물뿐이라고' 이런 구절은 여간 비위가 좋거나 자기 확신이 강하지 않다면 쓰기 어렵다.

 그 거리가 어땠든, 최승자도 김영태도 타박타박 두 발로, 두 다리로 걸어 가야 한다. 최승자는 산 이를 향하여 죽은 이의 걸음으로, 김영태는 죽은 이를 향하여 산 이의 걸음으로 간다. 최승자는 너에게, 김영태는 그대에게. 최승자의 너는 가깝지만 세계의 낯선 모퉁이만큼이나 멀리 있고, 김영태의 그대는 제일(祭日)에 찾아가는 산기슭이지만 심장의 감각으로는 커피숍처럼 가깝다. 그 길에 무엇이 가로놓였을지 어찌 알랴. 시만 읽고 사람의 영혼을 어찌 더듬을 수 있으랴. 또한 거리란 마음의 지각인 것을.
 나는 10년도 더 지난 어느 여름날 새벽에 아지오스 안드레아스에서 티라를 향해 가야 할 첫 차를 놓치고 망연자실한 적이 있다. 나를 태우기로 한 자동차 운전자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다. 나는 분노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혔다. 막막한 가운데 옛 가르침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Travel과 Trouble은 한 할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아이들 같으니 나그네의 숙명이로다.' 그 숙명은 곧 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아지오스 안드레아스는 아테네에서 차로 한 시간 떨어진 에게해의 바닷가이며 티라는 섬으로서 다른 이름은 산토리니이다.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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