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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융사]우크라 전쟁과 '새로운 인플레이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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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유·식량 등 원자재값 급등
세계대전후 인플레 100의 역사
수요와 공급 심각한 불일치
70년대는 오일쇼크가 뒤흔들어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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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인플레이션을 낳는다. 1913년부터 인플레이션을 기록한 미국 통계국은 100여년의 인플레이션 역사를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는 생경한 디플레이션의 역사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원유와 식량 등 원자재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고 있다. 세계 경제가 '새로운 인플레 시대'로 변화하는 중이다.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가장 큰 경제적 관심사는 인플레이션이 아니라 디플레이션이었다. 1930년대 초, 기록적인 실업률과 경기 침체로 소비자 수요가 감소하고 물가가 뚝 떨어졌다. 미국은 역사상 가장 큰 디플레이션 곧 대공황을 겪었다. 고통스러웠던 시대였다.


세계는 1차 대전으로 역사상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었다. 전쟁으로 10%가 넘는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당시 식품, 의류, 가정용품 등의 가격이 두 배 이상 올랐다. 전체적으로는 물가가 80% 이상 급등했다. 곧이어 발발한 2차 대전은 총력전이었기에 더욱더 엄청난 양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에 투입했다. 전쟁이 끝나고 1940년대 말이 되면, 전쟁이 낳은 호황은 끝나고 경제는 불황에 빠졌다.

인플레이션의 근본적인 원인은 수요와 공급의 변화다. 전쟁은 수요와 공급의 변화를 더 격렬하게 만든다. 특히 대규모 전쟁은 경제 전체의 자원을 군사적 용도로 전용한다. 이로 인해 일부 원료 또는 제품이 부족해지고, 나머지 제품의 가격도 올라갈 수밖에 없다. 각 지역의 연방준비은행은 폭주하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할인금리를 대폭 인상했다. 그 당시는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통일된 국가 통화정책을 펼치기 전이었다.

공급이 부족하면 인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루스벨트 행정부는 가격을 통제했다. 수요가 많은 제품에는 배급제를 도입했다. 이러한 전략은 전쟁 기간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데 효과가 있었지만, 전후 심각한 인플레이션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억제되었던 수요는 전쟁이 끝나자 폭발적인 인플레이션을 낳았다. 배급제와 가격 통제가 풀리면서 억눌렸던 소비의 쓰나미가 밀려왔다. 군인들은 집으로 돌아왔고, 여러 해 동안 성실하게 전쟁 채권을 사들였던 미국민은 저축한 돈을 쓰고 싶어 했다. 물건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급증했지만, 경제가 군수품에서 일반상품으로 다시 전환하는 데는 시차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후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인플레이션은 1946년 3월부터 1947년 3월까지 무려 20% 이상 상승했다. 하지만 가격을 더 올려도 소비자들의 강력한 수요를 막을 수는 없었다.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미국 가정은 2,000만 대의 냉장고, 2,140만 대의 자동차를 구입했다.

그런데 호황이 끝나면서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지게 되었다. 불황은 다행히 오래가지는 않았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인플레이션이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한국전쟁도 인플레이션을 촉발했다. 2차 세계대전의 식량 부족과 배급제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진 소비자들은 앞다퉈 가정용품, 부패하지 않는 식품을 구매했다. 이로 인해 1950년에서 1951년 사이, 제품가격이 10% 이상 뛰었다. 새로 창설된 ‘물가안정국’의 지휘 아래 연방정부는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물가통제와 배급제를 다시 실시했다. 다만 한국전쟁 당시의 식량 부족과 배급제는 제2차 세계대전만큼 심각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이후 억눌린 수요와 폭주하는 인플레이션은 다행히 관리가 가능한 정도였다.


실제로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는 강력한 소비자 수요와 경제 호황이 맞물린 기록상 가장 평온한 시기 중 하나였다. 그 기간 전년 대비 '인플레이션'은 1%에서 3% 사이였다. 50년대는 그야말로 번영과 물가안정의 시기였다. 그렇지만 너무도 짧은 봄이었다. 경제의 역사는 늘 문제가 많은 울퉁불퉁한 역사일 수밖에 없다.

사실,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후반까지는 강력한 소비자 수요와 경제 호황이 맞물린 기록상 가장 평온한 인플레이션 시기 중 하나였다. 세계대전 이후 경제 호황의 가장 격렬했던 시기가 끝나고 경제는 다시 불황에 빠졌다. 다행히 그것은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에 참여했고 인플레이션이 다시 뉴스에 등장했다. 이로 인해 1950년에서 1951년 사이에 전체 인플레이션이 6.8%로 치솟았고, 식품 가격만 10%나 뛰었다. 새로 창설된 물가안정국의 지휘 아래 연방정부는 1953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물가통제와 배급제를 다시 실시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전쟁이 인플레이션의 주요 동인이었지만, 하반기에는 유가가 이슈였다. 1970년대에 미국 경제는 두 차례의 '오일 쇼크'로 흔들렸다.

첫 번째는 1973년과 1974년이다. 아랍석유수출국기구가 이스라엘을 지원한 미국에 석유 금수 조치를 선언했다. 두 번째 오일 쇼크는 1979년 이란 혁명과 이란-이라크 전쟁으로 석유 생산이 중단되면서 발생했다. 유가가 급등하면서 휘발유, 난방, 전기, 심지어 식품 가격도 급등했다.


1차 '오일 쇼크' 동안 전체 인플레이션은 10% 정도 상승했고, 에너지와 식품 가격도 10% 정도 상승했다. 제2차 오일쇼크 때는 상황이 더욱 악화하여 1979년 3월과 1980년 3월 사이에 전체 인플레이션이 14.8%로 최고치를 기록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최고치였다.

인플레이션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높았을 뿐만 아니라 1970년대 후반의 경제도 침체에 빠졌다. 이 암울한 이중고를 '스태그플레이션'이라고 불렀다. 그야말로 '높은 인플레이션, 높은 실업률, 저성장'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포드 행정부의 핵심 정책 입안자들은 처음부터 의구심을 품었다. 연준 의장이 된 앨런 그린스펀은 포드의 경제자문위원회 의장이었는데, 그는 이 프로그램에 경악했다. 그린스펀은 그의 저서 '격동의 시대(The Age of Turbulence)'에서 이에 관한 백악관 회의에 참석했던 때를 회상했다. “연설문 작성자들은 수백만 개의 채찍 인플레이션 나우 버튼을 주문했고, 그중 샘플을 방에서 우리에게 나눠 주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던 유일한 경제학자였고, 나는 속으로 이건 믿을 수 없는 어리석음이다. 내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라며 “소상공인들에게 자발적으로 가격 인상을 포기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이 사람들은 적은 마진으로 운영되며 공급업체가 가격을 인상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백영란 역사저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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