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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말의 습격]마누라와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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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누라를 마누라라 부르면 싫어하는 마누라가 많다. 함부로 부르는 호칭인 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혹자는 이 말이 경상도의 어느 집안에서 신혼 첫날밤에 신부가 도무지 잘 생각을 하지 않자 "마, 누우라"라고 했던데서 나왔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마누라라는 말은 15세기 세종 때 만든 삼강행실도에 마노라라는 말로 등장한다. 마노라는 마마라는 말과 함께 윗사람에 대한 존칭이거나 극존칭이었다. 처음에 등장할 때는 남녀 구별이 없이 사용하는 호칭이었다. 상감마마 왕비마마 하듯이 선왕마노라 대비마노라란 말로 썼다. 이것이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아내를 호칭하는 말로 쓰이게 된다.

하춘화와 고봉산이 불렀던 옛노래 중에 '잘했군 잘했어'라는 것이 있는데, 노랫말이 부부의 대화형식으로 되어 있는 노래이다. 아내는 남편에게 "영감"이라고 부르고 남편은 아내에게 "마누라"라고 부르며 시작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마누라라는 말이 영 감이라는 말과 세트로 쓰이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영감(令監)은 조선시대 고관의 별칭이다. 대감(장관급인 판서)보다는 낮지만 종2품 정3품의 당상관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영감도 지내지 않은 남편을 영감으로 불러주는 것이, 그의 격을 높여주는 호칭이었듯이 대비마노라도 아닌 아내에게 마누라라고 불러주는 것 또한 그 격을 높여주려는 배려가 아니었을까 싶다. 영감과 마누라는 서로의 지위를 슬쩍 인플레시키며 존경과 사랑의 염(念)을 건네던 센스있는 호칭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영감이나 마누라나 모두 욕과 비슷한 표현이 되어버렸으니, 그건 호칭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들어있어야 할 존경의 염이 쏙 빠져버린 까닭이 아닐까 싶다.

아내라는 말은 '안해'라는 어원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은 이 의미를 '집안의 해'라든가 '남편 마음 속에 뜬 해'와 같은 멋진 풀이를 하여 여성들을 감동시키고 있지만, 옛사람들이 그렇게 고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닌 것 같다. 안은 집안(家內)이나 음양의 음(陰)을 뜻하는 말이고, 뒤에 붙은 '해'는 소유의 의미하는 '의 것'을 의미한다. 처용가에 나오는 '둘은 내 해언만 둘은 뉘 해엇고' 귀절의 그 '해'인 셈이다. 안애나 안에로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는 장소를 의미하는 '에'가 뒤에 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아내는 '지금 집에 붙어있는 사람'을 의미한다. 그리 감동적인 의미는 아니다. 아내가 집에 붙어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한자어 편안할 안(安)자를 봐도 드러난다. 여자가 처마 밑에 붙어있어야 편안해진다는 얘기다. 집사람이나 안사람이란 말은 아내라는 뜻과 거의 일치하는 말이다. 내자(內子)라는 말도 한 때 썼는데, 이 말은 안(內)+애(子, '에'를 뜻하는 표현)의 정확한 번역이다.

부인(婦人)이란 말은 결혼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한 족쇄같은 말이다. 여기엔 한 남자의 아내라는 뜻이 없다. 한 집안의 며느리가 된 사람이다. 자기 아내를 '내 아내'라고 일컫지 않고 '어머니의 며느리'라고 일컫는 그 언어관행은 여기서 나온 무의식이다. 부인이란 말은, 결혼한 여자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며, 무엇이 우선되어야 하는지를 천명하고 있다. 현모양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효부(孝婦)였다. 아내는 부모를 에둘러 다시 내려오는 며느리였다. 부인을 높이는 말중에 부인(夫人)이라는 말이 있는데, 우리는 퀴리부인같은 분에게 그런 호칭을 쓴다고 배웠다. 그런데 이 말은 '남편의 사람'이란 뜻인가. 그렇지는 않은 듯 하다. 저 부(夫)는 대부(大夫) 벼슬에 오른 자를 말한다. 그러니 부인(夫人)은 존귀한 사람의 처를 말한다.
와이프란 말은 처음에 들어올 때는 아내나 부인을 멋나게 부르는 호칭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칭의 뉘앙스가 전혀 들어있지 않은 평담한 말이어서, 곧 마누라와 비슷한 격의 말이 되어가고 있다. 내 벗 중에는 허즈번드를 줄여 '허즈번'이나 '허즈'라고 부르는 이가 있는데, 사랑스러워하는 말맛이 느껴졌다. 아내를 뭐라고 부르는 게 좋을지 고민하는 것보다, 그 말에 기품있는 경(敬)의 마음을 담는 것이 중요한 것이야 말할 나위도 없다. 말이 나빠서 사랑을 그르치겠는가, 말 속에 담긴 당신이 삐딱하면 천하의 마마 마노라님도 소용없다.





이상국 편집부장·디지털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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