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린다. 너무 많이 실어서, 서있으면 균형을 잡지 못하니 달린다. 더 많이 실을수록 더 빨리 달려야 한다. 현기증이 날 만큼 빨리 변하는, 이 탐욕의 과적사회에 과연 어느 정도의 지속가능성이 있을까?
어떤 이는 0.01%의 착취라 할 것이고, 그만큼 생활의 질이 높아지지 않았느냐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속사정을 알고 보면 깃털 하나만 더 얹어도 침몰할 배처럼 하루하루 떠다니고, 모래 한 알갱이만 더 떨구어도 산사태가 날 듯한 심사로 자리보전들을 하고 있다. 양띠 해라고 새삼 전도양양하지도 않고, 의기양양할 수도 없다.
이런 세상에선 청춘만 아픈 것도 아니다. 유한마담이 아닌 한 멈추기도 어렵고, 멈춰서 보이는 것들이 있어 본들 또 밀려가야 하는 생활인이다. 어차피 힐링은 셀프다. 힐링한다면서 연예인캠프 기웃거릴 일이 아니다. 세월호, 맹골수도 헤매듯 꾸려나가는 일상에서 때우는 한 끼는. 자기 장례식에 문상 미리 가듯 육개장이다. 불현듯이 마감이 닥치면, 쓰다 말고 중간에 끝나는 문장처럼 공연한 삶의 궤적이 돼 버리니, 최소한 종결어미와 마침표는 미리 준비할 일이다.
동성의 친우들 사이의 터치도 충분한 정신적 치유력이 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일과 관련되지 않는 한 주변의 관심은 줄어들고 신체접촉을 할 일이 없다. 그러다 늙어서 어설피 본능을 드러냈다가는, 여차하면 남우세스럽게 파렴치범으로 몰려 망신살이 뻗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금욕을 하자니 공력이 높다면 몰라도 심신이 괴롭다. 그래서 가족이 필요하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발휘되는 치유의 힘은 가히 종교적이다. 가족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박차고 나오지 못한 비루함, 가족에게서 보상받아야 한다. 수능시험일에만 수험생 아들 어깨 두들겨 줄 일이 아니다. 부모님 손 한 번 잡아드리는 정도는 어버이날 말고도 해야 한다. 사람은 손길을 기다리며 나이를 먹으니 말이다.
혼자서 못하면 같이 해결할 수도 있다. 필자가 지내던 독일의 마을에 꽤 괜찮은 모임이 있었다. 일정한 시간과 장소에서 뭔가 하소연할 사람이 나와 자기의 고민이나 어려움을 털어놓으면, 동참한 사람들이 맞장구치고 얘기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도 곳곳에 이러한 소모임이 있으면 좋겠다. 드러내자. 그리고 들어주자.
<ⓒ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