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전나무가 자라는 동안 이 땅은 왕조가 교체되는 대신에 허약한 왕들을 앞세운 사대부의 나라가 됐다. 공동체가 아니라 가문만 생각하는 유생들의 문약함은 일본강점기에 기회주의적인 행태로 나타났고 오늘날에도 노블리스만 밝히고 오블리제는 외면하는 권력층에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러한 세태는 을사늑약 이후 극명하게 드러난다. 나라를 빼앗기고도 벼슬아치니 양반네가 왜적에 붙는 현실이었다. 오죽하면 매천 황현 같은 이는 인간 세상에 식자 노릇하기 어렵구나라는 절명시와 함께 "내가 죽어야 할 의무는 없지만 나라가 선비를 기른 지 500년이 돼 나라가 망하는 날 한 사람도 죽는 사람이 없어서야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하는 유언을 남기고 자결을 하였을까.
우당이 옥사한 1930년대는 중국인과 연합한 조선인의 항일조직이 일본군과 게릴라전을 펼쳤던 시기다. 이에 대응해 일본군은 간도특설대를 앞세워 독립군 토벌에 나선다. 간도특설대의 사병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장교는 일본인과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항일운동을 하는 조선 청년들에 대해 무자비한 진압의 총구를 겨누었다. 윤봉길 의사가 폭사시킨 일본 육군 대장의 이름을 따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창씨개명한 간도특설대의 장교 출신 백선엽은 훗날 이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게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진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들이 역으로 게릴라가 돼 싸웠으면 독립이 빨라졌으리라는 것도 있을 수 없다"고 눙치려 한다.
을사늑약이 이뤄졌던 옛 덕수궁 자리 중명전에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아직도 떠도는 원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이회영과 6형제'라는 주제로 전시회가 열린다. 오는 3월1일, 일요일까지뿐이니 얼마 남지 않았다. 몰랐거나 미뤄뒀던 이들은 서두를 일이다.
김환학 서울대 행정연구소 특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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