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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알바시네]20. ‘밀양’, 용서의 모순에 관한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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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밀양'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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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우리집 책장에 꽂혀있기 시작한 건 적어도 10년은 됐으리라. 어느 헌책방에서 이청준이란 이름만 보고 집어왔던 책, 그러나 그때 이후 나는 이 책을 꺼내보지 않았다. ‘벌레 이야기’란 제목은 늘 보고 지나쳤는지라 익숙하다. 이 책은 약 4년간 경주의 가게에 가 있다가 최근 이사를 하면서 다시 내 책장에 돌아왔다. 영화 <밀양>을 보고난 뒤 그 원작이 이청준의 이 작품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가벼운 경탄을 내뱉었다.

이창동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 결심을 한 것은 2004년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2002년 3월에 열림원에서 나온 책을 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출판사는 영화 촬영에 힘입은듯 올해 5월 다시 개정판을 내놨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은 심지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1988년 10월판이다. 이 단편이 처음 발표된 건 1985년이었으니, 3년이 지난 뒤에 이청준의 다른 소설과 함께 모아서 펴낸 단편집이다. 나는 1997년 무렵에 3800원 짜리 이 책을 샀고, 줄거리도 모르는 채 책꽂이에 꽂아뒀다. 최소한 5년 뒤 이창동은 이 소설을 접하고는 ‘필’을 받았고 또 그것을 영화의 줄거리로 써야겠다고 작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동안에, 나의 책은 책장에 틀어박힌 채 죽 아무 생각없이 꽂혀 있었다. 이 작품이 ‘밀양’이라는 영화를 부화하는 사이에, 굳은 씨앗처럼 죽어있던 나의 책. ‘영화’를 본 뒤 뒤늦게 나는 보물을 재발견한 듯 소설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영화 '밀양'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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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고 영화를 보던 즐거움을 떠올린다. 그 즐거움에는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찾아내고 음미하는 일도 포함되어 있다. 문자로 표현하는 일과 동영상과 소리로 표현하는 일의 특징과 차이에 대해 느끼는 일도 재미있다. 영화 ‘밀양’은 원본의 줄거리에 충실하려고 하지 않는다. 모티프만 빌려왔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다. 내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도 있겠지만, 이청준이 얽어놓은 얼개보다 이창동이 짜놓은 콘티가 훨씬 현실감 있고 깔끔해보인다. 이청준은 소설답게 문자를 통한 사변(思辨)을 활용하는 편이지만, 이창동은 영화답게 스토리를 좀더 다양하게 하고 주인공의 캐릭터를 살려내고 또 사건의 진행에 속도를 붙였다. ‘밀양’은 ‘벌레이야기’라는 액자소설 하나를 이야기의 중심에 놓은 것 같기도 하다.

우선 두 작품의 같은 점들을 살펴보자. 이름은 다르지만 주인공은 여자이다. 소설에서는 알암이 엄마로만 나온다. 그 이름은 알 수 없다. 알암이를 마흔 가까이에 낳았다고 하니, 아이가 초등학교 4학년인 걸 감안하면 여자의 나이는 쉰 살 가까이 된다. 영화에서는 이신애이고 33세이다. 아이 이름이 준이니 준이 엄마이다.

영화 '밀양'의 한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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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양쪽 다 유괴범에게 아들을 잃는다. 아들을 살해한 사람은 소설에서는 주산학원 원장인 김도섭이고, 영화에서는 웅변학원 원장으로 나온다. 아이를 잃은 여인에게 다가와 전도를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여집사가 있는데, 소설에서는 이불집을 하고 있는 김집사이며, 영화에서는 약국을 하고 있는 김집사이다. 집사는 고통받는 여인에게 다가가 하느님의 용서에 관해 전하고 용서함으로써 자신을 구원할 수 있으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해준다.

마침내 여자는 아들을 살해한 죄수를 면회하러갈 결심을 한다. 소설의 여자와 영화의 여자는 똑같이, 죄수를 면회한 뒤 충격을 받는다. 그 죄수는 이미 하느님을 영접하여 너무나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고, 하느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았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의 범죄로 하여 그토록 고통받아온 자신이 용서하지도 않았는데, 하느님이 그를 먼저 용서하고 이미 죄책감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그를 보고, 여자는 분노를 느낀다. 이창동은 이 골격을 훼손하지 않고 영화에 이식했다. 그가 고민한 것은, 저 이야기의 힘과 여운을 전달하는데 영화적인 언어들을 어떻게 쓸까 하는 점이었을 것이다. 저 용서의 문제와 관련한 인간적인 혼란들을 돋을새기기 위해 이창동은 소설에 들어있는 가지들을 과감하게 쳐버렸다. 이를테면 여인의 남편을 없애버렸고, 아이가 장애아라는 점도 지워버렸다. 유괴라는 범죄가 강조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은 아이의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고, 유괴범을 찾는 수사과정도 단순화시켰다.

소설 '벌레이야기'

소설 '벌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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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다른 점을 중심으로 그 함의를 음미해보자. 우선 벌레이야기는 바로 아이의 실종부터 꺼내고 있지만, 밀양은 그 앞에 상당히 많은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놨다. 이신애는 피아니스트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뒤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와서 산다. 벌레이야기의 여인은 남편이 있고(그가 나레이터이기도 하다) 이들 부부는 약국을 운영한다. 신애는 밀양으로 오는 길에 자동차가 고장나 카센터 사장인 김종찬을 만난다. 종찬은, 이창동감독이 만들어낸 인상적인 배역이다. 영화 내내 신애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이 노총각이 없었다면 영화는 너무 어둡고 무거워서 스토리의 탄력을 잃었을지 모른다. 송강호의 거칠고 무뚝뚝한 캐릭터 속에서 새나오는 순수한 사랑은, 소설보다 더욱 외롭게 만들어놓은(신애는 남편을 잃은 여자다. 게다가 그 남편은 생전에 바람을 피웠고, 또 사업에 실패해서 그녀에게 고통을 안겨줬다. 신애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여인의 고단함과 불안을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영화의 알암이는 다리 한쪽이 불편하다. 소설의 준이는 내성적이고 말이 없다는 점에서 알암이와 비슷하다. 알암이는 주산학원에 다니다가 학원장에게 변을 당했고 준이는 웅변학원에 다니다가 똑같이 학원장에게 당했다.


그러나 유괴의 양상으로 보면 꽤 다르다. 알암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유괴됐다. 주산학원장은 알암이 엄마에게 돈을 요구할 겨를이 없었다. 아이는 재개발하기 위해 곧 헐리는 건물의 지하에서 살해되었다. 준이는 집에서 유괴되었다. 그리고 저수지에서 주검으로 발견된다. 유괴전화가 오고 또 아이의 시신이 발견되는 것의 시차를 이창동 감독은 원작보다 줄였다. 그리고 범인이 잡하는 시차도 줄였다. 범죄영화로 만들고 싶지 않았던 그의 고려였으리라.

영화는 웅변학원장이 어떻게 준이를 유괴하고 살해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 않다. 소설에는 등장하지 않는, 학원장의 딸 정아가 이 범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암시되어 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정아는 웅변학원 차에서 신애와 잠깐 만난다. 그리고 아이가 유괴된 뒤 돈을 놔두라는 장소에 정아가 있었다. 또 이 소녀는 사건 이후에 신애의 집 안을 훔쳐보기도 한다. 신애가 범인으로 학원장을 지목하게 되는 것도 정아의 수상한 행동 때문이다. 학원장이 구속된 뒤 정아가 또래의 남학생들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이 목격되고,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미장원에 취직해있다. 이 소녀는 신애의 머리를 자르면서 사고를 쳐서 ‘소년원’에 갔다온 사실을 말한다.


이 불량소녀가 유괴에 어디까지 개입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점은, 학원장의 범죄를 확신할 수 없게 만드는 측면이 있다. 딸의 치명적인 범죄를 감싸기 위해, 학원장이 대신 죄를 덮어썼을 정황도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엔 스토리의 골격을 흔든다. 학원장이 범죄를 직접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그의 회개와 하느님의 용서는, 신애가 부당하다고 여기기 어렵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가능성을 아주 닫아버리지 않았다. 여기에도 이창동의 뜻이 숨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 '벌레이야기'

소설 '벌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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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 50대 여인의 마음 속에서는, 아들 살해자에 대한 증오심과 그를 용서하는 문제와 긴박하게 대치하고 있지만, 영화 속의 30대 신애는, 남편을 잃은데다 아들까지 잃은 충격과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을 깊이 앓는 쪽이다. 분노를 사랑으로 바꾸는 듯 보였던 50대녀는 회개해서 평안하게 사형집행을 받은 원수에 대한 격분으로 결국 목숨을 끊게 되지만, 신애는 교회와 하느님에 대한 조롱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김집사의 남편인 장로를 유혹해 성행위를 벌이기도 하고, 목사의 기도 중에 김추자의 노래 ‘거짓말이야’를 크게 틀어놓기도 한다. 그녀를 위해 기도집회를 갖는 집의 창문에 돌을 던지기도 한다. 그녀의 분노가 ‘용서받은 살인자’로 향하지 않고, 그를 쉽게 용서해준 하느님에게 향함으로써, 그녀는 자살할 이유도 잃어버린 셈이 됐다. 목사의 말이 거짓말이라면, 목사가 권유하는 회개와 용서 또한 거짓에 불과할 수 밖에 없으니 말이다. 이창동은 소설에 있는 '범인 사형 소식'(벌레이야기에서 알암엄마는 사형수가 죽기 전 오히려 자신을 동정하는 말을 하는 것을 듣고 자살을 택한다. 이 사형수는 더구나 자신의 장기를 타인에게 이식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이 지상에 부분적으로 살아남는다.) 을 영화에서 빼버리고 있다.

밀양과 벌레이야기가 지니는 미묘한 차이는, 두 작품의 제목에서도 드러난다. 밀양(密陽)은 원래 ‘볕이 많이 드는 곳’이라는 의미일텐데, 영화 속의 신애는 ‘비밀의 햇빛’이라고 마음 대로 해석한다. 비밀의 햇빛은 이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된다. 햇빛은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이며 하느님의 뜻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저 햇살이 존재하는 방식은 미스터리에 가깝다. 비밀의 햇빛은, 뒤집으면 햇빛의 비밀이다. 기독교는 저 비밀을 문제삼지 말고 주어진 그대로 수용하라고 말하지만, 신애는 저 비밀에 항의한다. 하느님은 왜 피해자가 아직 용서하지 못한 범죄자를 앞장 서서 용서하는가. 범죄자를 평화롭게 만드는 일은, 피해자의 고통을 헤아리지 못한 일이니, 결과적으로 불공평한 일이 아닌가. 영화 ‘밀양’의 거리에는 자주 햇빛이 내려오고 있고, 신애는 저 햇볕 아래에서 하늘을 노려보기도 하고 오열하고 구역질을 하기도 한다.

‘밀양’이 신의 임재(臨在)에 관한 표현이라면, ‘벌레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호명이다. 인간은 영원히 신의(神意)에 도달할 수 없는 벌레들이다. 알암 엄마는 잠깐 하느님을 받아들이는듯 했지만, 사실은 피해받고 고통받은 자로서 ‘용서’라는 폼나는 행위를 통해 보상받고 싶어했다. 죄를 지은 자를 내려다보는 신(神)의 기분을 누리고 싶었다. 그것은 용서를 통해 진짜 평화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잠깐 분노를 분식(粉飾)하여 그것을 다른 감정으로 전환하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신의 빛 앞에 나오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벌레에 불과한 존재다. 묘하게도 영화 ‘밀양’은 평화를 얻은 살인자를 보고온 뒤에 쇼크를 받은 신애가 싱크대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를 보고 기겁을 하는 장면을 넣어놨다. 소설 ‘벌레이야기’를 보면서 그 제목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감 잡기는 어렵지만, 이 영화의 지렁이 장면을 보면 얼른 감이 올 판이다.

소설 '벌레이야기'

소설 '벌레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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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이청준이 시비붙은 것에는, 광주의 피얼룩을 감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해 전혀 용서를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해자들이 용서와 화해를 거론하는 우스꽝스러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 점에서라면, 저 용서 모티프는 하나의 풍자이다. 나는 2007년에 이창동이 이런 이야기를 들고나온 것에는 보다 풍부한 상황 변화의 함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독교라는 위세높은 종교가 빚어내는 논리의 섬세한 차질에 대해 그 종교의 아웃사이더들이 일정한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서슴없이 개종을 권하는 기독교인들의 전도 행위 앞에 괜히 기가 죽어 입을 닫아왔던 이 땅의 ‘비기독교인’들이 문득 발언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발언 내용은 인간의 눈높이에서 발견되는 하느님의 ‘용서의 모순’이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하느님은 그 원수에게도 평안의 기회를 줘버렸기에, 고통받은 인간이 나서서 사랑을 베푸는 일을 허용하지 않는 셈이 된다.

신애의 구토는 어쩌면 종교의 내면을 채 다 소화하지 못한 얼치기 신앙의 오바이트일 수도 있다. 영화도 소설도 벌레를 비난하는 쪽이 아니라, 그것을 변호하는 쪽에 서있다는 사실을 떠올려보는 건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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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스토리연구소장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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