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 시내에서 차로 4시간여 떨어진, 델마 C. 베게라 씨 부모님이 살고 있는 친정집의 모습. 오래된 고목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한 가건물에서 델마 씨의 친정어머니와 아버지, 막내 동생이 생활을 하고 있다. 6년 만에 고향에 온 델마 씨를 보러 인근 마을에 모여 사는 형제자매와 사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너머로 델마 씨가 남편 송진웅 씨와 한푼 두푼 모은 돈으로 크리스마스 때 고향에 선물한 현대자동차 승합차가 보인다.
원본보기 아이콘치매母 "넌 누구냐?" 한마디에 눈물 왈칵.."가족 있어 그래도 웃죠"
제주항공 필리핀 취항 기념 다문화가족 고향 방문 지원
남편ㆍ두딸과 함께 찾은 고향 한자리 모여 가족의 情 나눠
◆어느덧 10년 "고향 그리는 사이, 제주도 사람 다 됐어요"=필리핀 출신 델마 씨는 제주도에 산 지 올해로 10년째다. 지난 2001년 말, 18살 많은 남편 송진웅 씨와 결혼해 슬하에 두 딸(송유경ㆍ송유진)을 뒀다. 남편은 생활 가전 수리공으로 생계를 꾸리고 있다. 영어 강사와 펜션 청소를 하면서 벌이를 하는 델마 씨는 이번 친정 방문을 위해 펜션 일을 포기했다. 한국에 사는 동안 고향에 딱 한 번 다녀왔으니 이번에는 부모님을 꼭 뵙고 싶어서였다.
걸어서 5분 거리에는 필리핀 말로 향수를 나눌 수 있는 이웃사촌이 많이 생겼지만, 화상 통화로 부모님 얼굴을 가끔 볼 수 있었지만, 비싼 비행기 삯으로 엄두를 못 낸 고향을 드디어 갈 수 있다는 사실에 델마 씨는 지난 고된 삶이 잊히는 듯 했다고 한다.
초등학생 2학년 맏딸 유경은 남편 송 씨를, 올해 7세인 막내 유진은 델마 씨를 빼닮았다. 마치 해외여행을 가는 양 들뜬 아이들은 비행기 창가 자리다툼을 하고 기자의 스마트 폰이 궁금한 어린 철부지였지만 서투른 엄마의 한국말을 되잡아주는 속 깊은 마음과 순수한 눈망울을 지녔다. 이륙 후 4시간여가 지나고 드디어 필리핀 야경이 드러나자 유경은 "마이너스 한 시간의 나라다"며 엄마의 고향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나타냈다.
나무 기둥이 델마 C. 베게라 씨 집 지붕을 아슬아슬하게 지탱한 모습. 기둥 너머로 치매를 앓아 딸을 알아보지 못한 친정어머니가 과일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원본보기 아이콘◆"넌 누구냐" 한 마디에 참았던 눈물 '펑펑'=밝은 분위기는 델마 씨가 집에 들어서면서부터 반전됐다. 마닐라 시내에서 차로 4시간 정도 떨어진 시골 마을에 위치한 델마 씨 친정집은 6년 전 그대로였지만 분위기는 다소 침울했다. 밤새 달려 동틀 무렵 도착한 집에서 델마 씨를 반갑게 맞은 건 그녀와 꼭 닮은 막내 동생 뿐.
올해 78세인 친정아버지는 청각 장애가 있는데 최근 폐가 나빠지면서 거동이 힘겨울 정도로 쇠약했다.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하루에 한 두 차례 겨우 일어나 약만 복용한다. 노쇠한 부모님과의 감격에 겨운 뜨거운 포옹은 볼 수 없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델마 씨는 "너무 슬프다. 속상하다"를 반복해 뱉었다.
이내 슬픔을 뒤로 하고 델마 씨 형제자매는 한자리에 모여 밀린 이야기를 쏟아내면서 때론 한바탕 웃고, 때론 함께 눈물지으며 따뜻한 가족애를 나눴다. 남편 송 씨는 "생각했던 것보다 아내 고향 상황이 좋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며 "한국에 돌아가면 내달 만기가 돌아오는 적금으로 시집 올 당시 저당 잡혔던 논을 꼭 되찾아주고 싶다"고 말했다.
◆"가정 파탄 위기도 있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 오네요"=화목한 델마 씨 가족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다름 아닌 '언어의 장벽' 때문이었다. 10여년 전 한국에 온 델마 씨는 한국어를 배울 만한 여건이 안 됐다. 델마 씨는 "당시에는 국제 결혼자를 위한 한국어 교육 시스템이 없었고 남편과의 대화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두 딸이 자라면서 의사소통은 큰 문제가 됐고 델마 씨는 '죽기 아니면 살기' 각오로 한국말을 배웠다고 한다. 델마 씨와 같은 결혼 이민자가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힘든 점으로 언어 문제와 경제적 어려움을 꼽는다는 일반적 통계가 피부로 와 닿았다.
델마 씨 가족은 지난 6년 동안 고향 집을 방문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매번 서류 심사에서 탈락해 눈물로 아쉬움을 달랬던 델마 씨. 이번에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터라 감동은 배가 됐다.
남편 송 씨는 "필리핀에 들고 온 짐꾸러미에는 오래 전부터 마련했던 선물 중 포장지가 빛바랜 것도 있다"며 "뜻하지 않은 이번 기회가 너무 감사하다"고 전했다. 제주항공은 앞으로 1년 동안 델마 씨와 같은 다문화가족을 매달 선정해 필리핀행 왕복 항공권 등을 지원한다.
마닐라(필리핀)=김혜원 기자 kimhy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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