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
연재기사 111개
어떤 책을 읽을지 고민하는 독자에게 '이 책 어때'라고 권할만큼 흥미로운 내용을 다루는 최신 출간작을 소개합니다.
모르는 사람에게 더 비싼 시장
은행 창구의 말은 늘 부드럽다. 직원의 목소리는 친절하고, 상품 설명서는 합리적인 척한다. 그런데 사람을 망하게 하는 건 대개 노골적인 사기가 아니라, 사기처럼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구조다. '설계된 판'은 바로 그 점을 찌른다. 왜 어떤 사람은 금융에서 자꾸 지는가를 묻지 않는다. 왜 그렇게 지게 만드는 판이 멀쩡한 제도처럼 오래 유지되는가를 묻는다. 저자들이 제목에 도발적인 단어 '설계(fixed)'를 쓴 이유도 여기에
2026.04.24 14:01
현대차가 만드는 것은 정말 자동차일까
현대차를 자동차 회사로만 읽는 방식은 이제 조금 낡아 보인다. 엔진과 차종, 판매량과 점유율의 언어로는 이 회사를 끝까지 설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 바뀐 자리를 '피지컬 AI'라는 말로 묶어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행어가 아니다. 화면 속 AI가 아니라 공장과 도로와 물류 현장에서 몸을 얻는 AI, 다시 말해 데이터가 로봇이 되고 생산이 학습의 장이 되는 산업의 새 질서다. 질문도 거기서 시작된다. 현대차는
2026.04.10 14:37
AI가 대신 숙제하는 시대, 아이의 문장은 어디서 자라나나
아이 숙제 옆에 이제는 연필만 놓이지 않는다. 휴대폰이 있고, 태블릿이 있고, 뭐든 그럴듯하게 써 주는 챗GPT가 있다. "숙제? 챗GPT가 다 해 주는데 왜 제가 써요?" 이 책은 바로 그 낯익고도 서늘한 문장에서 출발한다. AI를 둘러싼 막연한 흥분이나 공포를 키우지 않는다. 대신 이미 교실 안으로 들어온 변화를 먼저 본다. 'AI, 교실로 침투하다'라는 장 제목은 과장이 아니다. 이 책은 AI를 미래 담론으로 밀어 올리지 않고, 아
2026.04.03 14:58
"울어도…될까요?"
출산율 얘기만 나오면 한국 사회는 늘 그래프부터 꺼낸다. 0.72에서 0.75, 다시 0.80. 선은 조금 들렸는데 사람들의 하루는 아직 무겁다. 결혼을 미루는 청년 앞에는 비싼 집이 서 있고, 아이를 낳은 부모 앞에는 늦은 퇴근과 비어 있는 돌봄 시간이 놓여 있다. 주형환의 '인구정책 대전환 700일의 기록'은 그 선 밑을 본다. 반등한 수치를 말하면서도 자꾸 저녁으로 내려간다. 2024년 합계출산율은 0.75명, 2025년은 0.80명으로 올
2026.03.27 12:56
바다 아래 핵, 책상 위의 결심
바다 밑으로 내려가는 것은 잠수함만이 아니다. 어떤 국가는 그 아래로 두려움과 결심을 함께 밀어 넣는다. '한국형 핵추진 잠수함'을 읽고 남는 것은 강철 선체의 형상보다, 그 선체를 끝내 만들어내려는 국가의 표정이다. 책은 잠수함을 설명하지만, 실은 잠수함보다 더 큰 것을 비춘다. 청와대와 국방부, 조선소와 원자로, 한미 원자력협정과 IAEA, 예산과 조직도 같은 것들. 물속 무기를 다룬 책인데도 자꾸 책상 위 풍경이 따
2026.03.20 13:25
"한 줄쯤은 괜찮겠지" 하고 넘긴 것들
출처를 달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문장들이 있다. 메모장에 잠깐 옮겨 적어둔 문장, 너무 여러 번 인용돼 이제는 누구의 것인지 흐려진 표현, '요약'이라고 적어놓았지만 사실은 원문을 거의 대신하는 문장. 출판 저작권은 법원 앞에서 먼저 시작되지 않는다. 대개는 이런 작은 방심에서, 책상 위에 흩어진 파일 몇 개와 저장해둔 문장 몇 줄에서 먼저 시작된다. 메일로 오가는 계약서가 있고, 교정지 위에 남은 붉은 표시, 번역
2026.03.13 13:37
왜 미국은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전쟁은 언제나 '결정'처럼 말해진다. 누군가 시작했고, 누군가는 멈출 수 있을 것처럼. 개전과 종전, 승리와 패배는 정치 지도자의 결단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이 책을 따라가다 보면 그런 언어가 점점 낯설어진다. 전쟁은 결단의 결과라기보다, 한 번 가동되면 스스로를 유지하는 구조, 다시 말해 시스템의 관성에 더 가까워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국방비를 쓰는 나라다. 국방 예산은 해마다 기록을 경신한
2026.02.27 11:00
사람은 결국 태도로 기억된다
"사람은 언제 드러나는가." 전선영의 '사람의 품격'은 이 질문을 붙들고 끝까지 간다. 대답은 친절하지 않다. 대신 기준을 바꾼다. 말이 아니라 태도에서, 성과가 아니라 책임에서 사람을 보자고 한다. 이 책이 말하는 품격은 예의범절이 아니다. 유리할 때의 태도도 아니다. 오히려 불리해졌을 때, 설명하고 싶어질 때, 관계가 끝나갈 때 남는 얼굴에 가깝다. 저자는 그 얼굴을 오래 지켜본 사람처럼 쓴다. 말이 많아질수록 가벼워
2026.02.25 18:25
선택은 순간이고, 후회는 습관이다
우리는 대개 "그때는 최선이었다"고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떤 날은, 그 말이 유난히 허술하게 들린다. 카드 명세서가 도착하고, 계좌 잔고가 줄어들고, 한때는 그럴듯해 보였던 선택이 지금의 나를 곤란하게 만들 때다. 그 순간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선택은 한 번으로 끝나지만, 후회는 반복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반복에는 꽤 일관된 패턴이 있다는 사실을. 강민욱의 '경제학자의 의사결정법'은 바로 그 패턴을 추적하는
2026.02.20 15:09
우리는 왜 늘 문턱에 서 있는가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잘 살자"는 말부터 경계한다. 제주에 정착한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 정은혜의 이 에세이는 성공담이나 힐링서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목표를 제시하거나 삶의 방향을 단정하지도 않는다. 대신 자신의 삶을 관통해 온 하나의 반복된 상태를 전면에 놓는다. 헤매는 시간, 그리고 그 시간이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문턱 공간(liminal space)'이다. 이 책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보다 '우리는 왜 늘
2026.02.13 12: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