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법 시행 앞두고 규제 직격탄 맞은 중소 화학업체
“화관법·화평법 적용 자체가 폐업하라는 소리” 성토
도금(표면처리) 업체 공장 작업자들이 크롬도금제품을 가공하고 있다.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이 최근 116개 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실태조사 결과 81%에 달하는 94개 업체가 현행 화관법 시설기준을 못 지킨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경제 김희윤 기자] 경기도 안산시에 있는 도금 중소기업 A사는 황산, 염산 등 비폭발성 화학물질을 취급하지만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시행을 앞두고 공장 내부를 불연소재로 바꾸는 개보수 작업을 해야 한다. 이 회사 안민규 대표는 "이미 화재나 폭발은 산업안전보건법으로 충분히 규제하고 있고, 도금 공정에서 산류가 빠질 수가 없는데 화관법에 따르면 공장 내화구조를 불연소재로 바꿔야한다"며 "코로나19로 일감은 반토막 났는데 공장 보수에만 수 천 만원을 들이게 생겼다"고 호소했다. 그는 "공사 중에는 공장을 멈춰야 하는데, 납품으로 먹고 사는 우리 같은 회사가 그 비용을 어떻게 한 번에 감당하나 싶어 답답하다"고 했다.
인천에 위치한 한 염료 중소기업에서는 120여종의 염ㆍ안료를 취급한다. 합성염료를 주로 생산하는 국내 업계 특성 상 이 업체가 제조단계부터 다루는 화학물질 수는 500여종에 달한다.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화평법)이 내년부터 시행되면 1000t 이상 사용되는 유해정보 등록 물질 적용에 따라 취급하는 500여종을 등록해야 한다. 이 회사 조정훈(가명) 대표는 "물질 하나 등록하는데 수 천만원에 이르는 비용이 발생하고, 시험비용까지 합하면 수 억원대로 비용이 증가한다"며 "국내에선 염료 제조에 제약이 많아 대부분 중국이나 해외에서 반가공 형태로 수입해 작업하는데 시험ㆍ등록비용을 고스란히 국내 업체가 떠맡아야한다면 차라리 공장을 외국으로 옮겨야했나 하는 후회가 앞선다"고 말했다.
화관법 시행을 앞두고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 9월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화학중소기업의 80.3%가 취급시설 정기검사 유예기간이 재연장돼야 한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표 = 중소기업중앙회
원본보기 아이콘지원금으로 연명…영세 中企 현장은 아직 준비 안돼
화학물질이 주원료가 되는 도금(표면처리), 염색, 염료, 안료 중소기업이 화관법과 화평법 시행을 앞두고 폐업 위기에 처했다. 최근 중소기업중앙회가 화학기업 3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화관법 실태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 기업의 80.3%가 '정기검사를 유예해야한다'고 답했다. 현장은 아직 준비가 안됐다는 얘기다. 더구나 코로나19 장기화로 이들 기업의 매출은 전년 대비 평균 35.8% 감소했고, 공장 가동률은 26.8% 감소한 것으로 조사됐다.
표면처리 업종의 경우 유독물질만 사용하지만 화관법에 따르자면 폭발물질 점검, 내진설계 등을 포함한 413개 항목의 정기검사를 받아야 한다.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에 따르면 이 업종은 50인 미만 업체가 대부분이며 평균 부채비율은 400% 이상이다. 업종 특성상 60% 이상이 임대공장을 사용하고 있고, 코로나19 확산 이후에는 고용유지지원금으로 연명하는 곳이 상당수다.
"예산 지원·현실적 유예 절실"
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이 최근 116개 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긴급 실태조사 결과 81%에 달하는 94개 업체가 '현행 화관법 시설기준을 못 지킨다'고 답했다. 이상오 조합 전무는 "화관법으로 시설물 개보수 작업을 해야 하지만 코로나19로 자금력이 바닥 난 중소업체에겐 법 적용 자체가 폐업하라는 소리나 다름없다"며 "환경규제 시설개선을 위한 정부의 예산 지원이나 현실적 유예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화학기업 중 화관법이 적용되는 기업은 1만4000여 곳으로 추산된다. 직격탄을 맞은 표면처리, 염료ㆍ안료 기업의 제품은 반도체, 자동차, 가전, 섬유 등 국내 제조업 전반을 지탱하는 대표적 뿌리산업이다. 이 전무는 "도금업체가 줄폐업에 내몰리면 국내 제조업이 입는 타격도 상당히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곽노성 한양대 특임교수는 "화평법, 화관법은 미국이나 일본보다 더 강력한 규제강도를 보이고 있어 중소화학업체 입장에선 폐업을 고려할 만큼 위기에 직면한 상황"이라며 "지난해 일본 화이트리스트 사태를 계기로 소부장 강국으로 도약하겠다는 정부 정책 이면에선 소재산업의 근간이 된 화학산업을 흔드는 환경 규제가 기업을 옥죄는 만큼 등록ㆍ관리 절차를 대폭 간소화하고, 기업의 자율적 노력을 인정하는 기업환경 만들어야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김희윤 기자 film4h@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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