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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한국은행은 아르헨티나중앙은행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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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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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중앙은행의 설립목적에 물가안정 외에 금융안정은 물론 '고용과 경제성장 및 사회적 평등'까지 포함된 것은 8년 전 일이다. 당시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법률적 독립성의 마지막 한 조각마저 사라졌다"면서 아르헨티나중앙은행이 "정부의 돼지저금통"이 됐다고 평가했다. 20세기 초만 해도 아르헨티나는 '미래의 나라'였으나, 지금은 경제가 나락으로 떨어진 지 오래다. 아홉 번째 국가부도(디폴트)를 간신히 넘긴 게 바로 수개월 전이다.


한국은행 설립목적에 고용안정을 추가하려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한창 진행 중이다. 고용불안 완화를 위해 한은의 실물경제 지원을 차제에 강화하자는 움직임이다. 취지는 이해되나 표준적 관점에서 볼 때 대단히 위험한 접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한은법 개정안은 재고돼야 한다.

통화정책은 거시경제정책이다. 당연히 그 목적함수에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은 물론 국민경제 차원의 완전고용, 지속적 경제성장과 국제수지 개선이 모두 포함된다. 이에 따라 통화정책은 총수요 조절을 통해 궁극적으로 거시경제안정을 도모하게 돼 있다. 한은법 제4조 '정부정책과의 조화'는 바로 이런 맥락이다. 그러므로 한은 목적조항에 고용안정을 굳이 추가할 이유가 없다. 추가하면 되레 문제가 심각해진다. 통화정책 거버넌스(독립성·책임성)의 치명적 훼손으로 국민경제에 과중한 부담이 초래될 것이 크게 우려되기 때문이다. 우선 중앙은행과 정부 간 정책시계(policy horizon)가 다르다는 점부터 살펴보자.


오늘날 중앙은행의 양대 책무는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이다. 물가안정은 효율적 자원배분을 통해 고용안정 및 경제성장이라는 실물적 목적을 중장기적으로 달성하는 데에 여전히 가장 효과적이다. 또한 금융안정은 중앙은행의 태생적 책무다. 19세기 후반 유럽의 중앙은행들은 최종대부자로 행동하면서 오늘의 근대적 중앙은행으로 변모했다. 1913년 미국 의회가 탄생시킨 연방준비제도도 처음부터 금융안정당국으로 설계됐다. 금융계약은 시간 경과를 전제하므로, 물가안정과 함께 금융안정도 중장기 개념이다. 그래서 중앙은행에겐 중장기 정책시계가 금과옥조다.


한편, 선거로 선출된 민주 정부는 단기 시계에 집착한다. 국민에게 경제적 성과를 당장 보여줘야 재집권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긴축을 표방하는 정부라도 내심으론 고용과 경기를 부양하려는 팽창 유인을 갖게 마련이다. 그런 정부의 통화정책은 시간적 일관성을 갖기 어렵고, 시장과 민간의 신뢰를 얻지 못한 정책은 결국 실패한다. 이런 이유로 각국 정부는 통화정책을 중앙은행에 위임하고 중장기 시계에서 정책을 펼치도록 독립성을 보장한 것이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한은이 고용안정 목적을 떠안는다고 가정해보자. 이때 한은이 고용안정을 위해 정부에 협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단기적 금융지원이다. 달리 뾰족한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단기 조치에서 한은이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할 근거는 없다. 고용안정 목적은 시계의 차이로 물가안정·금융안정 목적과도 자주 충돌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같은 한은이 물가안정·금융안정에 필요한 중장기 시계를 독립적으로 유지하기란 실제로 불가능할 것이다. 또한 한은에 명확한 책임성을 부과하기도 곤란할 것이다. 고용안정을 위해 정부와 한은이 각기 취한 조치의 성과를 구분해내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책결정 주체인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의 위원 구성에도 머지않아 중대한 변화가 생길 수 있다. 결국 고용안정 목적이 추가되면 통화정책 거버넌스의 붕괴로 한은이 총체적 정책실패에 직면할 위험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연준은 통화정책에서 '최대고용'을 더욱 중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연준은 그 자신이 고도의 정치역량으로 중무장한 정책당국이다. 우리가 뭐든 따라 할 수 있는 여느 중앙은행이 아니다. 그보다는 파탄 지경의 경제에서 고용·성장에 평등 목적까지 짊어진 아르헨티나중앙은행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함의를 곱씹어봐야 한다.


[김홍범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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