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유럽 건축 조경의 중요한 구성 원리를 따릅니다. 건물을 짓고 마을을 만들면 건물과 건물 사이 골목이 생기고, 기다란 골목들이 적절히 이어지는 곳에 숨 돌릴 여유 공간이 생기죠. 그 공간이 바로 광장입니다. 광장 주변엔 성당이라든지 관청이라든지 마을의 핵심 건축물이 들어서지요. 크기는 상관없습니다. 축구장보다 큰 광장이 있는가 하면 농구 코트만 한 광장도 있습니다. 골목과 광장. 제가 경험한 유럽 마을 공간 구성의 큰 뼈대입니다.
중정에 무언가를 채워 아름답게 가꾸면 정원이 됩니다. 물론 정원이 집 밖으로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정원은 광장과는 다른 공간 구성 철학을 가지죠. 광장이 비움의 원리를 따른다면 정원은 채움의 원리를 따릅니다. 다른 것들로 많이 채워져 있는 곳에 가면 내 주체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정원에서는 그 구성 요소들이 주체이며 나는 객체일 뿐입니다. 어쩔 수 없이 구경꾼이 되는 거죠. 정원에 가면 나는 채워진 공간 사이를 떠도는 손님입니다.
빈 곳에 가면 주체가 각인되지요. 내가 주인이 되는 겁니다. '숨어 있는 나'가 아니라 '드러나는 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있어도 열린 하늘 아래 똑같은 '하나'입니다. 광화문광장 촛불의 진정한 힘은 '국민주권 주체' 경험의 공유와 그 확산 아닐까요. 비워진 곳에 내가 채워지는 거죠. 너도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됩니다. 비우고 열어뒀기 때문에 주체의 자기 확인과 연대가 가능한 겁니다. 비움으로써 태어나는 광장. 거기서 우리는 주인 됨의 집단 탄생을 경험합니다.
살짝 기울어진 높다란 야자나무 위로 나무 치료사가 밧줄을 걸고 오르고 있습니다. 그는 나이 든 나무와 건강 상담을 하려나 봅니다. '마리아, 많이 아파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손을 모으며 걱정스레 쳐다봅니다. 공간의 손님이라도 이런 때는 행복하죠. 정원의 주인공들이 너나없이 아름답다는 걸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스페인 광장 역시 아름답습니다. 같은 이름을 가진 유럽의 모든 광장 중에서도 군계일학이죠. 규모, 디자인, 구성 철학, 어느 하나 빠지지 않고 훌륭합니다. 공중에서 보면 반달을 머리에 얹은 듯한 나무의 모양새. 물길을 돌려 옆구리에 끼고 있는 앉음새. 그 물길 따라 주요 도시들의 역사와 휘장으로 꾸민 지방 관청 건물. 거기에 각 도시의 역사적 사건을 증언하는 찬란한 채색 타일 모자이크. 분리된 공간을 잇는 반월형 다리. 숨어 있던 물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중앙 분수…. 이 중에서도 배 떠다니는 물길 디자인이 압권입니다.
축구장보다 큰 돌바닥 광장은 어느새 배들이 떠다니고 정박하는 항구의 꿈을 실현하는 지상 거점이 됩니다. 이는 세비야란 도시의 역사와 현실, 미래의 비전과 관련이 깊습니다. 세비야는 과달키비르강 어귀에 있는 내륙 항구 도시로 예나 지금이나 교역의 중추 기지죠. 대항해 시대를 연 찬란한 에스파냐의 꿈이 어린 곳입니다. 그 마당을 커다랗게 비워두면 모이는 사람마다 자기 주체를 분명히 인지할 테죠. 21세기의 콜럼버스가 그냥 나올 리 없습니다. 우리나라 광화문광장을 새로 만든다는데, 광장 공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기대합니다. 주체와 무의식이 역동적으로 활성화되는 자랑스러운 공간이 되기를 여기 스페인 광장에 서서 저는 꿈꿉니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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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는 못 참겠다, 한국·일본으로 떠날래"…중국 ... 마스크영역<ⓒ투자가를 위한 경제콘텐츠 플랫폼,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