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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의 몸으로 쓰는 이야기] 문경지교(刎頸之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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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석 문화스포츠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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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商)나라 사람들은 거북의 배 껍질이나 짐승의 어깨뼈를 사용해 점을 쳤다. 그 결과를 새긴 글자가 갑골문(甲骨文)이다. 복사(卜辭)라고도 한다.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을 참고해 한자를 발명했다지만, 갑골문을 한자의 기원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상나라는 실재가 확인된 최초의 중국 왕조인데 그 역사는 기원전 1600년경에 시작돼 기원전 1046년경에 막을 내린다. 마지막 도읍이 은(殷)이어서 은나라라고도 한다. 상나라에는 온갖 제사가 많았다. 제사를 지낼 때 점을 쳐서 과정을 확인하고 신탁과 은혜를 청하였다.
그들은 갑골문에 수많은 제사의 기록을 새겼다. 이를 통해 제사 때 사용한 제물, 곧 당대의 작물과 가축 등을 짐작해볼 수 있다. 사람을 제물로 바쳤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순장과 같은 인신공양은 고대 세계에서 흔한 일로, 세계 곳곳에서 흔적이 발견된다.

'벌십강(伐十羌)'을 새긴 갑골이 있다. '강족(羌族) 사람 열 명의 목을 베다'라는 뜻이다. 강족은 고대 중국의 서북부에 터를 잡은 민족이다. '피부가 흰 강족 사람 세 명을 제물로 삼으리까(唯用三白羌于丁)'라는 글귀가 남아 백인(白人)으로 추정하는 학설도 있다.

'伐十羌'의 '伐'은 오늘날 '칠 벌'로 사용하지만 본디 '목을 자르다'라는 뜻이다. 글자의 모양은 창(戈)을 들어 사람(人)의 목을 막 베려는 순간을 표현했다. 인신을 바치는 행위는 고대 세계 어느 곳에서든 가장 신성한 제의에 속했다. 상에서는 강족 사람의 목을 벰으로써 제의를 완성했다.
목(neck)은 머리와 가슴을 잇는 신체부위다. 좁은 통로와 같은 이곳을 후두, 기도, 식도, 갑상샘, 주요 혈관, 신경, 림프조직이 머물거나 지나간다. 이곳을 벰은 곧 생명을 거둔다는 뜻이다. 그래서 목은 '생명'의 동의어다. '내 목을 걸겠다'는 말이 얼마나 엄청난 뜻을 담았는지 우리는 안다.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군 염파는 혜문왕이 환관의 집 식객에 불과하던 인상여를 중용하자 불만을 품었다. 인상여를 만나면 단단히 망신을 주리라 공언했다. 인상여가 염파의 뜻을 알고 마주치치 않으려 피해 다녔다. 아랫사람이 왜 그토록 염파를 두려워하느냐고 물었다.

"진(秦)나라가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나와 염장군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다투면 나라가 위태로워진다."

염파가 그 말을 전해 듣고 크게 뉘우쳤다. 옷을 벗고 형구(荊具)를 짊어진 채 인상여를 찾아가 섬돌 아래 꿇어앉아 빌었다. 사마천은 <열전>에 기록하기를 이 일로 두 사람이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나누었다고 하였다. 목이라도 베어 바칠 정도로 막역한 사이라는 뜻이다.

스스로 목을 바침은 상대를 가장 소중한 것을 바쳐 지켜야 할 지고한 가치로 받아들이는 행위다. 조선의 첫 천주교 사제 김대건은 참수(斬首)를 당했다. 교회는 그의 죽음을 순교(殉敎)로 규정한다. 목은 고사하고 터럭 한 올 바칠 데 없는 시대는 불행하다. 가치가 실종된 시대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몇 회에 걸쳐 목 이야기를 하겠다. 참혹하고도 매혹적인 인간 역사, 고귀함과 비루함이 올림픽 메달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그 곳.

문화스포츠 부국장 huh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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