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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고속도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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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차를 세웠습니다. 아니, 무서워서 멈췄다고 하는 게 더 옳은 것 같습니다. 눈 한번 껌벅였다 싶었는데, 몇 백 미터가 꿈길처럼 흘러갔습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축구장 한 바퀴쯤의 거리를 자동차 혼자서 달린 것입니다. 아찔했습니다. 머리털이 곧추섰습니다.
 '나하곤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문장들이 일시에 모여들었습니다. 제 차를 포위했습니다. '졸음운전의 종착지는 이 세상이 아닙니다.' '졸음운전-영원히 잠들 수 있습니다.' '겨우 졸음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고속도로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그런 경고문구들이 빈말이 아님을 실감했습니다.

 요즘 고속도로의 안전을 관리하는 이들이 졸음운전과 한바탕 '전면전'을 벌이는 이유를 온몸으로 확인했습니다. 운전자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표어들이 왜 그리 많아졌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들이 어째서 그렇게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문장이어야 하는지도 절로 이해됐습니다.
 그것들은 대부분 '죽느냐 사느냐'의 살벌한 이분법(二分法)으로 비극적 결말을 또렷이 깨닫게 하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졸음이란 놈은 어지간한 회유나 협박에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애당초 말로 타이르고 글로 주의를 준다고 달아날 녀석이 아니지요. 이성적으로 타협이 가능한 상대라면 뭐가 문제겠습니까. 녀석은 정말 안하무인(眼下無人)! 인정도 사정도 살필 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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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든 군인도 무서워하지 않고, 목숨을 걸고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려는 선방(禪房)의 스님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최전방 고지의 초병(哨兵)에게는 '졸면 죽는'다는 구호가 명찰처럼 붙어 다니고, 공부하는 스님들에게는 '죽비'소리 요란한 경책(警策)이 떠나질 않는 것일 테지요. 그것만 다스릴 수 있어도 부처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다고 합니다. 오죽하면 졸음을 마귀 취급하여, '수마(睡魔)'라 부르겠습니까.

 졸음에 대한 방책은 꼭 한 가지. 잠을 자는 것입니다. 운전자라면 차를 세우고 쉬는 것 말고는 방도가 없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고속도로는 이제 권유나 위협 대신 신신당부를 합니다. "전방 2㎞에 졸음쉼터, 졸리면 제발 쉬어가세요." '제발'이란 두 글자가 참으로 눈물겹게 읽힙니다. 이쯤 되면 통사정입니다, 애걸복걸(哀乞伏乞)입니다.
 '제발' 졸음에 저항하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놈을 이기려고 덤비다가는 되레 잡아먹히기 십상이니, 싸우려하지 말고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라는 충고입니다. '져주는 게 이기는 것'이라는 승리의 이치를 간곡히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순순히 져주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잠깐 눈을 붙이려 해도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쉬고 싶어도 쉬지 못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야간비행중인 조종사가 그럴 것이고, 언제나 비상대기중인 안전요원들의 밤이 그럴 것입니다. 밤새 달려가야 하는 화물트럭 기사가 그럴 것입니다. '부모형제 나를 믿고 단잠을 이룬'다는 군가의 주인공처럼 부릅뜬 눈으로 나라를 지키는 병사가 그럴 것입니다.
 밤에만 국한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지하철 기관사에겐 낮 근무도 야근과 다를 바 없겠지요. 끊임없이 껌을 씹어가면서 졸음과 싸운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습니다. 수면시간이 태부족인 수험생들의 사정도 비슷할 것입니다. 갖은 묘책을 다 써보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내리덮이는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에는 언제나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자고 있는 사람과 깨어있는 사람. 누군가의 잠을 위해 누군가는 깨어있고, 누군가 깨어있는 덕분에 누군가는 편히 잠을 잡니다. 자고 일어난 사람은 자신을 위해 밤을 지새운 이의 노고에 고마워하면서 '불침번(不寢番)'의 자리로 달려갑니다.
 불침번은 말할 것도 없이, 잠들지 않고 서 있거나 주어진 길을 가야 하는 사람. 그는 자신의 수고 덕분에 세상이 무사하고 평화로운 것에 행복해 합니다. 그걸 보람으로 알면서 사랑하는 사람이 잠을 깰세라 발뒤꿈치를 들고 걷습니다. 기침도 참고, 혼자 깨어있는 시간의 고독과 적막을 참고 견딥니다.

 잠을 자야 할 사람과 이제 일어나 나가야 할 사람이 그윽한 눈길로 서로를 바라보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그런 상상에 참으로 어여쁜 동시 한 편이 겹쳐집니다. 윤석중 선생의 '먼 길'입니다.

 아기가 잠드는 걸/보고 가려고/아빠는 머리맡에/앉아계시고//
 아빠가 가시는 걸/보고 자려고/아기는 말똥말똥/잠을 안자고//

 아침에도 잠자리에 드는 사람들과 한밤중에도 집을 나서야 하는 사람들을 헤아려봅니다. 물고기는 밤낮 눈을 뜨고 있다지요. 산사(山寺)의 풍경과 목어와 목탁이 모두 물고기 형상을 하고 있는 까닭을 짚어봅니다.
 지금 저는 깨어있어야 할 사람인지, 그냥 잠에 빠져도 좋을 사람인지를 생각해봅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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