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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의 행인일기] 소리판에서

최종수정 2020.02.11 16:36 기사입력 2016.11.1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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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제림 시인

윤제림 시인

이땅의 한 시절, 극장에 가면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야 했습니다. 영화를 보러가서도 '국민의례'를 하던 시절이었지요. 동해에 해가 떠오르고 을숙도에 철새들이 날아오르는 화면을 지켜보면서 애국가가 다 끝날 때까지 서 있어야 했습니다. 황지우 시인의 시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에 잘 그려지고 있는 광경입니다.

 그보다 조금 더 오래된 기억입니다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모두가 일어서던 적도 있었습니다. 대개는 영화가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주인공이 천신만고 끝에 꿈을 이루는 대목에서 그랬습니다. 다 죽어가던 영웅이 기사회생하여 우뚝 서는 장면에서 그랬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날 때 그랬습니다. 이를테면, 춘향전에서 이도령이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암행어사 출도야!" 그 한 마디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관객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납니다. 힘껏 박수를 칩니다. '이제 우리 춘향이 살았다'는 안도감의 표현입니다. '변학도 넌 이제 죽었다'고 소리치며, 한껏 참았던 분노와 격정을 일시에 쏟아내는 승리의 함성입니다.

 알 수 없는 통쾌함과 짜릿한 전율이 있었습니다. 비루하고 답답한 일상에선 느낄 수 없는 쾌감이기도 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행복한 관객이었습니다. 감독의 '필모그래피'에 관심을 가진 사람도, 숨겨진 메시지를 읽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미장센'은커녕 '크레디트 타이틀' 같은 용어도 몰랐습니다. 그저 입을 헤 벌리고 영화를 보았습니다. 침을 흘리며 보기도 했습니다.
[윤제림의 행인일기] 소리판에서

 그냥 이야기에 빠졌습니다. 아무도 분석하고 평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스크린 안으로 들어가 스토리 속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춘향전을 보러 간 사람이면 모두 춘향이가 되었습니다. 적어도 영화를 보는 동안은 춘향이의 일이 자신의 일이었습니다. 팔짱을 낀 구경꾼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엊그제, 그런 맛을 보았습니다. 예술의 전당이 기획한 판소리 무대였지요. 저는 두 시간 내내 춘향이가 되고 심청이가 되었습니다. 심청이 아버지가 젖동냥을 다니는 대목에서 눈물을 질금거렸고, 어사 장모가 된 '월매'가 엉덩이춤을 출 때엔 따라서 춤추고 싶어졌습니다. 소리판이 끝났을 때는 손바닥이 아프게 박수를 쳤습니다.
 오랜만에 판소리를 현장에서 들었습니다. 아니, 그 판에 끼어 그날의 소리를 완성하기 위해 관객으로서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판소리는 창자(唱者) 혼자 힘으로는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고수(鼓手)가 밀고 당겨주어야 하며, 관객이 들었다 놨다 해주어야 합니다. 함께 한 이들이 소리꾼의 기운을 어르고 추슬러주어야 합니다.
 그날의 판은 소리와 북, 그리고 추임새가 잘 어우러진 마당이었습니다. 한 소리꾼의 작품세계가 '하나의 국악장르'로까지 대접을 받는 이자람 씨의 소리판답게 시종 흥겨웠습니다. 그녀의 이름값을 아는 사람이라면 놀랄 일도 아닐 것입니다. 많이들 알다시피, 이자람 씨는 판소리가 전통적 형식과 규범에만 묶인다는 것은 너무나 밑지고 속상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스승의 입에서 제자의 마음으로 전해지는, '구전심수(口傳心授)'의 바탕을 지켜나가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습니다. 옛것의 미덕은 계승 발전시켜나가되,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년처럼 아무도 생각지 못했던 길을 찾아냅니다. 연극을 소리로 짜기도 하고, 소설을 무대로 옮겨내기도 합니다. 덕분에 젊은이들이 국악에 흥미를 갖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답게 세계가 관심을 갖게 합니다.

 문득, 이 하수상한 시절이 소리판만 같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도자는 저 젊은 소리꾼처럼 자꾸 새로운 세상을 열어내는 사람이어야 할 것입니다. 위정자(爲政者)들은 북 치는 이처럼 명창의 소리가 장강(長江)의 물결처럼 순리(順理)대로 흐르게 도와야겠지요. 그런 무대라면 관객들은 절로 신명이 날 것입니다. 추임새가 제 어린 시절 극장의 박수소리처럼 다시 터져 나올 것입니다.
 요즘, 광화문의 밤이야말로 엄청난 소리판입니다. 춘향과 이도령, 방자와 향단이와 월매가 손을 잡고 나옵니다. 심봉사와 청이, 죽은 곽씨 부인에 뺑덕어미까지 한 목소리를 냅니다. 흥부와 놀부가 어깨동무를 하고 광장에 모여 외치는 소리가 '적벽가'처럼 천지를 울립니다. 조금 더 있으면 산속 짐승들과 용궁의 물고기들까지도 몰려나올지 모릅니다.

 우리는 행복한 관객이고 싶습니다. 사필귀정(事必歸正)의 결말에 일제히 일어나서 박수를 치고 싶습니다. 모두 한쪽을 바라보면서 어사 출도를 학수고대합니다. 심봉사 눈뜨는 대목을 기다립니다. 흥부의 박에서 무엇이 나올지 궁금해 하면서, 토끼도 자라도 잘 되기를 기원합니다.

 추임새도 얼마든지 준비하고 있습니다. '좋-다', '얼씨구', '지화자'…'그렇지', '잘 한다', '이쁘다'. 절로 터져 나오는 탄성이면 무엇이나 좋다고, 이자람 씨가 새삼스럽게 가르쳐준 것들입니다. 그런 소리들. 어서 외치고 싶습니다.

윤제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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