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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샘]정님이 누나를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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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며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이마의 흉터를 가린 긴 머리, 날랜 발/ 학교도 못다녔으면서/ 운동회 때만 되면 나보다 더 좋아라 좋아라/ 머슴 만득이 지게에서 점심을 빼앗아 이고 달려오던 누나/ 수수밭을 매다가도 새를 보다가도 나만 보면/ 흙 묻은 손으로 달려와 청색 책보를/ 단단히 동여매 주던 소녀/ 콩깍지를 털어주며 맛있니 맛있니/ 하늘을 보고 웃던 하이얀 목/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지만/ 슬프지 않다고 잡았던 메뚜기를 날리며 말했다/ 어느해 봄엔 높은 산으로 나물 캐러 갔다가/ 산뱀에 허벅지를 물려 이웃 처녀에게 업혀와서도/ 머리맡으로 내 손을 찾아 산다래를 쥐여주더니/ 왜 가버렸는지 몰라/ 목화를 따고 물레를 잣고/ 여름밤이 오면 하얀 무릎 위에/ 정성껏 삼을 삼더니/ 동지섣달 긴긴 밤 베틀에 고개 숙여/ 달그당 잘그당 무명을 잘도 짜더니/ 왜 바람처럼 가버렸는지 몰라/ 빈 정지 문 열면 서글서글한 눈망울로/ 이내 달려나올 것만 같더니/ 한번 가 왜 다시 오지 않았는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시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 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

-이시영의 '정님이'
대학 시절 이 시를 읽으면서 울컥, 목이 메었다. 70년대의 군홧발과 80년대의 최루탄을 통과하면서, 우린 저마다 세상과 독대(獨對)하는 고독한 공인(公人)이 되어버렸지만, 사실은 저 어처구니없이 슬픈, 내밀한 이야기들을 몇 자락씩 가지고 있었다. 정님이 누나와 용산역 여인 사이의 숨 막히는 괄호 안에, 죽기 살기로 뛰어다닌 우리의 시간이 있었다. 행방불명으로 분류되는 아픈 과거들이 저마다 있었다. 술 취한 뒤의 필름처럼 끊어졌다 이어지는 한 줄기 기억의 실오라기 끝에는 어린 날의 정님이 누나가 있었다. 내게도, 진달래꽃 꺾어와 뒤에서 살그머니 안겨주던, 실없이도 사랑 많던 그런 소녀가 있었다. 이시영의 기억을 가만가만 좇아가며 나는 울음을 삼켰다. 소녀의 검은 얼굴과 검은 손과 맑은 눈을 솎아낸 시간이 그제야 통증처럼 느껴졌다.

통금은 어느새 풀렸지만, 우린 저 기억으로 돌아가는 통행을 여전히 금지당하고 있는지 모른다. 용산역전 밤 열한 시 반에 지친 걸음의 사내에게 다가와 팔짱을 끼는 여자를 추억이라 말하는 일은, 이제 낯설고 부끄러운 일인가. 가난에 쫓기고 절박한 살이에 내몰려 마침내 용산역에 나앉은 그 착한 여자는, 이제 흘러간 노래가사 속에서나 들어있는 신파(新波)이지만, 나는 부끄럽게도 그 여자가 아직도 실감나고 그 여자가 돌아누우며 신음하는 '지난 날'을 채 다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그래. 지금 정님이 누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시 속에 자신이 들어앉은 줄도 모르고, 신세 조진 수많은 시골 처녀들의 괴롭고 숨찬 길을 걸어갔을까. 도시의 음습한 골방에서, 꽃처럼 시들어갔을까. 살아있다면 이제쯤 몹시 옛날이 그립기도 하리라.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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