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하나하나가 꽃에 잎에 인간의 몸에 /그리고 저희끼리 몸 부딪쳐 만드는 소리 아닌, /땅 위에 뒹굴며 내는 소리 아닌, /서로 간격 두고 말없이 내려와 /그냥 땅 위에 떨어져 잦아드는 저 빗소리. /그 소리 마냥 어두워 동공이 저절로 넓어진다. /나무들의 뿌리들이 보인다. 서로 얽히지 못하고 /외로이 박혀 있는 뿌리도. /내 잘못한 일, 약게 산 일의 /엉켜진 뿌리들도 보인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푸덕이고 날아간다. /마음 바닥에 잦아드는 저 빗소리. /시간이 졸아드는 소리.
-황동규의 '늦가을 빗소리'
빗소리는 어떻게 생겨나는가.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소리라고 하는 것들은 대개 무엇엔가 부딪쳐야 난다. 비의 소리는 비와 사물이 부딪치는 소리일 것이다. 그러니까 꽃이나 잎이나 사람, 아니면 지표면 따위의 무엇에 빗방울이 닿았을 때 그 소리가, 빗소리가 되어야 하리라. 그런데 그렇지 않을 때에도 들리는 소리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빗방울이 허공에 내리지르며 내는 소리, 바로 그것 말이다. 한 방울이라면 소리는 들리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데 여러 방울이 간격을 두고 몇 번이고 허공을 때리면서 소리를 만든다. 빗방울들이 허공에 부딪치는 소리. 황동규의 귀는 그걸 붙잡아낸다.
이 시의 시안(詩眼)은 '그 소리 마냥 어두워 동공이 저절로 넓어진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대목에 이르면 그만 황홀해진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을 때 동공이 커져서 희미한 사물도 분간해내는 것처럼, 그의 귀에 들려온 이 미묘한 어두운 소리는,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눈을 뜨게 한다. 귀의 어둠이 눈의 밝음으로 나아가는 이 멋진 반전은 이 시의 후반부 전체를 설레게 한다.
허공을 때리는 소리를 들은 귀 때문에, 심봉사처럼 개안(開眼)한 시인은 나무들의 뿌리를 볼 줄 알게 된다. 빗방울들이 스며드는 그 땅 아래 깊숙이 들어간 눈. 빗방울의 눈이 되어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땅속의 사연을 읽어간다. 외로이 박혀있는 뿌리, 그리고 엉켜있는 뿌리. 그리고 그 뿌리는 곧 자아와 세상의 형상으로 읽혀지기도 한다. '눈'은 세상을 퍼와서 자아 속에 들여놓기도 하지만 이미 눈 속에 자아가 들어있어 세상을 읽는 일에 끼어들기도 한다. 감정이입이나 선입견은 대개 눈 속에 든 자아의 작동이다.
황동규의 심안(心眼)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그 투시의 초능력 가운데서도 스스로의 생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잠깐일 뿐 오래 머무는 건 아니다. 멧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가는 소리가, 살풋 얹혔던 감상(感傷)을 털어간다. 날아가는 소리가 잦아들면서 빗소리는 더욱 깊이 귓속으로 고인다. 소리는 어두워지면서 마음 바닥까지 잦아들고, 마침내 시간 전부가 졸아든다. 소리가 눈을 밝게 하고 소리가 마음 바닥에 닿고 소리가 드디어 시간을 거둬간다.
문설주에 기대선 박목월의 산지기 눈먼 처녀의 귀를 가진 시인. 아득한 공간과 어둑한 시간이 고요한 귓바퀴에서 두근거린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시인)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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