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철도 잠잠…日 사토리세대의 데자뷔
[아시아경제 손선희 기자] #1. 30대 초반인 A씨는 최근 발표된 승진 명단에서 누락돼 동료들의 위로를 받았다. 그런데 정작 스스로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담담했다. '승진 못하면 어때. 오래만 다니면 되지'. 승진을 통한 출세의 욕심은 잊은 지 오래됐다. 몇 년 전부터 A의 목표는 '최대한 회사 오래 다니기'가 됐다.
#2. 최근 부장으로 승진한 B씨는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주변의 승진 축하세례가 '회사 그만둘 날이 얼마 안 남았네'로 들린다. 승진의 기쁨도 잠시 B부장은 속으로 생각한다. '회사에서 월급 받으며 일할 수 있는 날이 앞으로 얼마나 남았을까….'
삼성그룹 각 계열사는 매년 3월 초 승진잔치로 들뜬다. 축하 인사와 함께 각 부서·동기별로 승진 축하 회식도 줄을 잇는다. 그런데 올해는 유독 삼성의 3월이 조용하다. 승진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이 변하고 있는 탓이다.
삼성전자 지방사업장의 한 부서는 지난해 하반기 '수석 8년차 이상 근무자'를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신청 받았다. '나이 00세 이상, 근속 00년 이상' 등 근무 연한으로 퇴직 대상자를 분류했던 이전과는 달리 '직급별 연차'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해당 부서의 한 직원은 "빨리 승진하면 빨리 퇴직 대상자가 될 뿐"이라며 "책임(직급)을 최대한 오래 달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렇다보니 삼성 임직원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승진 인사에 달관하게 됐다. 직원들은 승진한 동료에게 축하보다 "천천히 가는 게 좋다"는 조언을 한다.
삼성전자를 비롯한 몇몇 계열사들은 몇 년째 저조한 실적이 이어지자 최근 기본급까지 동결해 가며 '성과주의'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커지는 불안감에 '승진의 야망'보다는 '안정된 현실'을 추구하는 직원들이 늘고 있다. 회사는 채찍질을 하지만 정작 직원들은 일본의 '사토리 세대'를 닮아가고 있다.
손선희 기자 sheeson@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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