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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혼례날 쫓겨난 여인의 한(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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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3)

[千日野話]혼례날 쫓겨난 여인의 한(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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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강선대에서 칭명연(稱名宴)을 가졌을 때, 울음이 북받쳤던 제 어깨를 가만히 두드리며 달래준 분이 바로 공자(이산해)이십니다. 소년이지만 존경할 바가 많습니다. 나이의 차이야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조물주가 만들어준 순서일 뿐이니 어찌 지초와 난초의 향기를 나눌 수 없다 하겠습니까."
산해가 웃으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치기(稚氣)를 보듬어 주시니 부끄러움을 잠시 잊을 듯합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사월이가 주안상을 다시 차려왔다.
"누추한 살림이라 내놓을 것이 없지만, 강선대 비바람과 물결소리를 안주 삼아 드시옵소서."
"허허, 이렇듯 술이 나오고 밖엔 풍우가 몰아치니, 이야기 한 자락을 하면 딱 좋을 성 싶소이다. 두향은 선암사(仙巖寺)에 계신 육손이대사에 대해 들어봤습니까?"
"아, 단양의 정기를 받아 100세를 넘게 사신다는 그분 말씀입니까?"
"예. 그 스님이죠."
"아, 불경 대신 사서삼경을 줄줄 꿰며 설법을 베푼다는 분 말씀이지요? 저도 들은 바가 있습니다."

공서도 끼어들었다.
"예. 얼마 전 그분과 오래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지요. 그런데 뜻밖에 놀라운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더군요."
"아, 그러셨습니까?"
"육손이대사는 원래 안동사람으로 속성(俗姓)이 김씨였다 합니다. 왼손 손가락이 여섯인지라 어린 시절부터 육손이라 불렸다 하더군요. 육손이는 형이 일찍 죽어 그 아들을 거두어 키웠는데, 자신의 두 자식보다 조카에게 더 사랑을 쏟았지요. 조카의 이름은 인산(人山)이었지요. 김인산이 장가갈 때가 되자 육손이가 공을 들여 신부감을 골랐다 합니다. 혼례를 치르던 날 밤에, 인산이가 신혼방에서 뛰쳐나오는 일이 생겼습니다. 그는 숙부인 육손이에게 달려와 이렇게 말했지요. '신부가 신방에 들어온 뒤 막 촛불을 끄자, 어둠 속에서 웬 도적이 문을 벌컥 열고 달려들어와 '네가 나를 배신하다니. 정(情)을 네가 가혹하게 잘랐으니 나도 너를 베리라'하고 칼을 휘두르고는 도망쳤습니다. 불을 켜보니 신부의 비단치마가 반이 잘려나가 있었다 합니다."

"어머나!"
두향이 놀라 비명을 질렀다.
좌중은 모두 긴장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인산이 숙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과거가 어지러운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집안 사당의 제사를 맡길 수야 있겠습니까? 결혼을 취소하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육손이는 당황스러웠지만 파혼을 하고, 신부 집안과는 발길을 끊었다는군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 괴한은 잡았습니까?"
공서가 재촉하자 이지함은 말했다. "사연이 생각보다 길더군요. 백주(白酒)나 한잔 들이킨 뒤 이야기를 잇지요."
"여인의 행실이 정녕 그랬다면 혼인을 서둘러 중지한 것이 잘한 일일 듯합니다만."
이산해도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그런데 신부는 참으로 억울했다 합니다. 혼전에 아는 남자라고는 없었는 데다가 그 도적이 어디서 왔는지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혼례날에 남편에게 쫓겨난 셈이 되었으니, 한을 품고 살아갈 수 밖에 없었고요. 몇 해가 지난 뒤 신부는 그 부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합니다. '이 여식은 이미 버린 사람이 되었으니, 죽은 셈 치고 돈 삼천 꿰미를 주시면 나가서 살겠습니다.' 여인은 소복을 입고 계집종과 함께 육손이 마을에 집 한 칸을 세내서 술장사를 하기 시작했다 합니다."

"허어."
공서가 묘한 탄성을 질렀다.
"계집종을 내세워 장사를 했는데, 술과 안주 맛이 일품인 데다 술값도 싸게 받아 동리 사내들이 즐겨찾는 곳이 되었지요. 외상술값을 심하게 채근하는 일도 없고, 돈 대신 옷가지 따위도 받아 인심도 후했다 합니다. 육손이와 김인산도 이곳을 자주 찾아 단골이 되었지만, 주인장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지요. 여인은 김인산의 집안사정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요."

"왜, 그렇게 접근했을까요?"
두향이 궁금해 물었다.
"아마도 뭔가 짚이는 게 있지 않았을까 싶네. 여하튼 이야기를 더 들어보게나."
이지함은 두향에게 미소를 보내며 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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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이영우 기자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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