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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의지하던 바를 한 순간에 잃었나니(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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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81)

두향은 관에서 붙여준 몸종 사월이를 데리고 기방을 나왔다. 행수기생은 이 갑작스런 사태에 영문을 몰라했고, 몇몇 어린 기생들이 저고리 고름을 들어 눈물을 훔쳤으나 두향은 오히려 담담한 얼굴이었다. "혹여 차후의 기약이라도 있었더냐?"라고 묻는 행수의 질문에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소녀가 뜻한 바 있어, 나으리에게 오랜 청원을 넣어 기적을 벗게된 것이니, 괜한 허물을 삼진 말아주오." 그렇게만 말할 뿐이었다. 이황은 그녀가 자주 머무르던 강선대 바위 아래에 작은 오막집을 하나 지어주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이황은 그뒤 단양에서 근무하는 내내 한번도 두향을 찾지 않았고 길에서조차 마주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였다.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묻는 일도 없었다.
그해 여름 공서가 강선대로 가서 그녀를 찾았다. 비가 몹시 쏟아지던 날이었다. 핼쓱하나 여전히 고운 두향이 그를 맞았다. "어이 이리 누추한 곳을 찾아주셨는지요. 공서 나으리를 뵈오니, 8경을 음풍(吟諷)하던 지난 날로 돌아간 듯 하옵니다." 공서가 말을 잊고 한참 그녀를 바라보다가, 이윽고 마른 기침을 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빗소리가 사나우니 이러다간 강선대가 잠길 듯 하오, 그런 즈음에 향(香)의 목소리를 들으니 이것이 바로 잠대문향(潛臺聞香)이 아니겠소이까. 어찌 이런 일이 있단 말입니까."

"사또 나으리를 성토할 요량이면 아예 말씀을 꺼내지 마옵소서."
"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운명이 하도 야속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이 몸이 박복하여 이 지경을 만든 것이니 어이 다른 탓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바위 주변에 청매(靑梅)만을 가려 심어 늘 그를 뵙는 듯 하니 어찌 외롭다 할 수 있겠습니까. 아침저녁으로 경(經)을 읽고 글씨를 쓰고 시를 읊으니 가히 사인(士人)의 영화를 빌려 누리는 것 같습니다. 어찌 이 생활이 과분하다 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리고 늘 궁금하던 것이 있었는데, 그 밝달선비 명월(明月)은 어디로 가셨는지요?"
"듣자 하니, 남쪽으로 더욱 내려가 지리산 쌍계사에 머물고 있다 하더이다. 그곳의 차(茶)가 좋아 스님들의 차 덖는 일을 돕는다 들었지요."
"참으로 기이한 사람입니다. 여자의 몸으로 그렇듯 모든 걸 벗어버리고 새처럼 자유로이 천하를 날아다니는 이가 조선천지에 또 있겠습니까?""젊은 시절 시화와 예능으로 세상에 크게 떨친 바 있었으나, 그것이 무상함을 깨닫고 학문에 발을 들여 깊은 경지까지 나아간 것 같더이다. 저 벽에 붙은 '대자(大字)' 웅필은 사또의 글씨임이 분명한데..."
"그러하옵니다. 결별의 날에 나으리가 이요루에서 써주신 것입니다. 혹애일매(惑愛一梅)는 매화와 사람 간에 오가는 한 순간의 깊은 정의(情誼)를 뜻한다 하셨습니다."
"불혹(不惑)의 끝자락에 혹(惑)을 고백한 바 되었으니, 어찌 괴로움이 없었다 하겠소."
"......"

두향은 가만히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 공서는 말했다.
"점필재(김종직,1431-1492)가 당(棠, 해당화)이라는 기생을 거절할 때 읊은 시가 생각나는구려. 막향무산뇌객혼(莫向巫山惱客魂) 소인지시망수문(騷人只是望修門). 쓸쓸한 나그네 마음을 야한 생각으로 향하게 하지 마소서. 시인은 다만 공부하는 문턱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랬지요. 그러자 그 해당화 기생이 이렇게 뒷 구절을 이었지요. 동풍이월당화조(東風二月棠花早) 유게주남사자헌(留憩周南使者軒). 2월의 봄바람은 해당화를 꽃피우기엔 이르니, 변방의 여관에서 그냥 머물러 쉬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허허. 그랬지요. 저 기생은 점필재의 뜻도 살려주고 자신의 자존심도 살렸으니 가히 지혜롭다 할 만합니다. 두향은 마음이 깊이 의지하는 바를 한 순간에 잃었으니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나으리께서 헤어지던 날, 제게 '활인심(活人心)'을 알려주셨습니다. 명나라 주원장의 아들인 주권(朱權 1378-1448)이 지은 것으로 도가의 양생법이었습니다. 나으리가 스물 세 살 때에 이 책을 만났다고 하셨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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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
일러스트 이영우 20w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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