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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千日野話]두향에게 이별을 선언한 퇴계(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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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섬의 스토리텔링 - 퇴계의 사랑, 두향(79)

[千日野話]두향에게 이별을 선언한 퇴계(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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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도수매를 사랑하듯 꽃 피는 한 철에 너에게 깊이 혹해 있었으나, 더 이상 그러하다가는 도탄에 빠진 고을백성들에게도 죄를 짓는 것이 되고 성은(聖恩)과 국은(國恩)에도 고개를 들 수 없는 수령이 되고 말 것이다. 내가 못난 수령이 되고 어리석은 인생을 산다면 나를 기꺼이 받아준 너에게도 욕이 되리라. 매화 피던 날에 너를 품었고, 매화 진 날에 다시 너를 품었으니, 이제 너는 매화처럼 내 평생의 계절에 피고질 것이니라."
"하옵시면?"
"고을의 관기(官妓)가 그리 많지는 않다만, 이곳의 역을 지나는 사신(使臣)이 드문지라 숫자를 줄여도 큰 지장이 없을 듯하다. 차라리 너 한 사람이라도 생산을 하는 백성으로 삼기 위해 기적(妓籍)에서 방면(放免)할 수 있는지 내가 알아보았다.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관아 밖의 민(民)으로 살 수 있었으면 좋겠구나."
"나으리. 저를 관기(官妓)에서 방면하신다는 말씀이옵니까? 천한 이 몸을 그토록 깊이 생각해주시더니 감당하기 어려운 배려이옵니다. 그러면 저는 방면되어 누항(陋巷)에서 살아가되, 다만 나으리는 다시 뵙지 못하고 마음으로만 사모하며 지내야 한다는 말씀이온지요?"

"바로 그러하다."
"궁벽한 산골에 와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백성들의 형편을 바꿔야 하는 목민(牧民)의 도가 얼마나 엄중하고 시급한 일인지 소녀가 어찌 모르겠사옵니까? 평생을 사모하던 대학자이며 천하의 소객(騷客ㆍ시인)이신 나으리를 잠깐이나마 이리 가까이 모신 것도 더할 나위 없는 은총이며 복락인줄 잘 알고 있사옵니다."

"두향아. 내가 여기 머무는 동안 만이라도 너를 가까이 하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너를 아끼고 그리워하는 마음이 지나쳐 정사(政事)에 집중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온 힘을 기울여도 이 땅의 산업을 살리고 기민(饑民)을 모면할 방책이 나올까 말까 한데, 어찌 내 일신이 원하는 일을 찾느라 금쪽같은 기회를 거듭 놓칠 수 있겠느냐. 기실, 내 충심을 다해 사랑한 두 부인과 소실 이래로, 몸과 마음이 온전히 동하는 깊은 정념을 지녀본 적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너는 나의 매화이며, 내 심금 속에 살아있는 두보(杜甫)의 향기이다. 그러니 서러워하지 말아라. 울지도 말아라. 네가 울면 내가 우는 것이고 네가 아프면 나도 아프다."
"서러워할 리 있겠습니까? 오직 나으리만을 생각하며 남은 생을 살기로 작정한 저입니다. 어찌 나으리의 마음을 모르겠사옵니까?"
"네 눈에 눈물이 고여있지 않느냐? 서운한 것이 틀림없지 않느냐?"
"나으리."
끝내 두향이 울음을 참지 못하고 이황의 품에 달려와 안기고 만다. 들썩이는 어깨를 바라보는 남자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거린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이황이 말했다.

"두향아. 이 서액(書額)은 네가 보관하거라. 혹(惑)과 애(愛), 일(一)과 매(梅) 그 글자마다 담긴 뜻을 새기면 마음에 힘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혹(惑)은 내가 너를 얼마나 정신 못 차리도록 사랑했는지를 가리키는 한 글자이며, 애(愛)는 너와 나 사이에 있었던 곱고 애틋한 마음들의 자취를 드러내는 한 글자이다. 또 일(一)은 우리가 오롯이 하나가 되었던 기억들이며, 매(梅)는 우리 사이에 피어났던 강하고 아름다운 정신의 길을 가리키는 말이란다."

"아아. 혹, 애, 일, 매. 그 깊은 뜻 사모하며 늘 새기겠사옵니다. 두향은 나으리와 저의 화연(花緣)을 이뤄준 도수매 분(盆)과 매화등 걸상을 이 별리의 날에 바칠까 합니다. 곁에 두고 저를 보듯 봐주시어요."
"고을 수령으로 백성을 물건을 받는 것이 가당치 않구나. 하지만 큰 허물이 되지 않는다면 너의 신물(信物)만은 내 곁에 놓아두고 싶어지는구나."

두향과 이황은 이별의 말들을 나누고 있었다. 천지가 무너진 것 같은 심정에 두향은 혼절할 듯 어지러웠으나, 눈물을 닦지도 않고 끝까지 그를 지켜보았다. 다시는 보지 못할 것 같은, 이 그립고 높은 사람을 가장 가까이에서 우러르는 마지막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속>

▶빈섬의 스토리텔링 '千日野話' 전체보기




이상국 편집에디터 isomis@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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