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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커스리더學] 문정대비는 과부요 전하는 고아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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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리더십키워드7 -남명 조식의 직언 리더십
조선시대, 이런 상소를 올린 이가 있었다
義실천 다지며 칼 차고다닌 선비
퇴계·율곡과 함께 16세기 거목


[아시아경제 조슬기나 기자] "전하의 국사(國事)가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에게서 멀어졌습니다. 자전(慈殿:문정대비)께서 생각이 깊다 하지만 깊은 궁중의 과부(寡婦)에 불과하고 전하는 어려 단지 선왕(先王)의 한낱 외로운 후사(後嗣)에 불과합니다."
1555년 상소 하나에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단성현의 현감자리를 제안받은 남명 조식(1501~1572)이 사직상소를 내며 평소 품은 직언들을 쏟아낸 것이다. 이것이 곧 '단성소(丹城疏)'라 불리는 을묘사직상소다. 갓 스물을 넘긴 명종은 이 소를 읽고 대노하며 남명을 불경군상죄(不敬君上罪)로 다스리라 명했다. 신성불가침적 존재나 다름없는 국왕과 대비를 과부, 고아(외로운 후사)로 표현한 것은 당시로선 목숨을 각오했다 하더라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승정원이 '그의 소(疏)는 우국 충정의 발로(發露)'라고 극구 말리면서 최악의 상황은 면했다. 오히려 조선왕조실록 사관이 이 일을 두고 "왕이 신하의 상소에 대해 답을 하지 않고 도리어 문책하는 것은 자유로운 언로를 막는 것"이라며 오히려 남명을 높이 평가했다.

남명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서애 류성룡 등과 함께 16세기를 대표하는 학자다. 과거 시험공부를 하던 중 성리대전(性理大典)에 실린 원나라 학자 허형의 글을 읽고 깨달음을 얻어 출세를 위한 학문보다는 유학의 본령을 공부하는데 전념했다. 평소 칼을 차고 다닌 선비로도 알려져 있다. 대표적인 유학자지만 무인다운 성정을 갖춘 자로도 전해진다. 당시 대비 문정왕후의 수렴청정과 윤원형을 비롯한 외척들의 활개, 임꺽정의 난과 왜구의 침략에 이르기까지 혼탁한 시대에서 그는 국왕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직언을 쏟아낸 선비 중의 선비로 꼽힌다.
남명은 단성소에서 명종의 국사를 "큰 나무가 백년 동안이나 벌레에게 속을 파먹혀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해 언제 위험한 상태가 올지 모르는 실정에 오래 있었다"고 비유한다. 또한 "형세가 극도에 달해 사방을 둘러봐도 손쓸 곳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소관(小官)은 아래에서 히히덕거리며 주색이나 즐기고 대관(大官)은 위에서 거들먹거리면서 오직 뇌물을 긁어 모으는 데 혈안"이라며 "고기배가 썩어 들어가는 것 같은 데도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그는 "내신(內臣)들은 파당(派黨)을 세워 궁중의 왕권을 농락하고 외신(外臣)들은 향리에서 백성들을 착취해 이리떼처럼 날뛴다"며 "가죽이 다 닳아 없어지면 털이 붙어 있을 곳이 없는 이치를 모르고 있다"고 한탄했다.

남명의 직언은 단지 대관 이하 권력자들의 타락을 꼬집는데서 그치지 않았다. 그의 글은 왕과 대비에게도 날이 섰고 거침이 없었다. 남명은 "자전께서 생각이 깊다고 하지만 깊은 궁중의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께서는 어려 한낱 외로운 후사에 불과하다"며 "수많은 천재(天災)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무엇으로 감당해내며 어떻게 수습하겠냐"고 반문했다. 그는 사직의 이유 중 하나로 "벼슬을 도적해서 그 녹만 먹고 하는 일 없이 지내는 그런 신하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남명은 당시 왜구 침략 등의 원인이 명종의 국사에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남명은 "평소 조정에서는 재물로 사람을 임용하니 재물만 모이고 민심이 흩어져 결국 쓸만한 장수도 없게 되고 성안의 병사 한 사람 남아있지 않기에 이르렀다"며 "적이 무인지경으로 쳐들어 온 것은 오히려 당연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이어 "근위병을 모으고 나라일을 정돈하는 것은 오직 전하의 마음에 달려 있다"며 "전하께서 종사하시는 일이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반문한다. 그는 " 학문, 성색(聲色), 궁마(弓馬), 군자, 소인 등 (왕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이냐에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다"고 덧붙였다.

이 소에서 남명은 "왕도의 법이 왕도의 법답지 않으면 나라가 나라답게 되지 못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명종의 대노를 미리 짐작했듯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할 수 없다"며 "죽음을 무릅쓰고 아뢴다"고 끝을 맺었다.

재야 지식인으로 존경받았던 남명은 이 소로 인해 논란의 중심에 섰다. 또한 사림(士林)을 비롯한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존경과 찬사를 받으며 선비 중의 선비로 재차 평가됐다. 혼탁한 시대를 멀리하고 스스로를 바로 한, 하늘 아래 그 누구에게도 거침없었던 그의 날선 문장이 '선비의 도리'를 찾는 이들을 매료시킨 것이다. 남명이 평소 가까이한 소학(小學) 효경(孝經)편에는 '천자에게 직언을 하는 신하 일곱이 있으면 비록 그 자신이 도가 없더라도 천하를 잃지 않는다'는 구절이 있다. 이처럼 그는 보다 바로 선 세상, 큰 세상을 위해 반드시 직언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이였던 것이다.

남명은 1568년에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선조가 두 차례 불렀을 때도 상소를 내며 이를 사양했다. 당시 68세의 노신하는 무진봉사(戊辰封事)를 통해 역대 임금이 다스림에 실패했던 사례를 지적한다. 그는 무진년에 밀봉한 이 소에서도 거침없이 직언한다. "예로부터 권신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기도 했고, 외척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기도 했으며, 부녀자와 환관이 나라를 마음대로 했던 일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처럼 서리(胥吏)가 나랏일을 마음대로 했던 일은 없었다"고 꼬집은 그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을 논하며 "통치의 방책은 다른 데 있지 않다. 군주가 참됨을 밝히고 몸을 정성되게 하면 된다"고 강조했다.

남명이 지은 시조에는 부귀와 영달을 버리고 인간이 가야할 진리를 쫓는 선비정신이 그대로 담겨있다. 그가 지리산에서 읊은 '덕산복거(德山卜居)'가 대표적이다. "봄 산 어느 곳엔들 꽃다울 방초가 없으랴만 다만 천왕봉이 하늘과 가까움이 좋다. 백수로 돌아와 무엇을 먹을 것인가. 은하수 맑은 물을 내가 언제 다 마실까."

(도움말: 현대경제연구원)



조슬기나 기자 se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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