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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 저축은행 '막장 드라마'의 조연들

최종수정 2020.02.11 14:17 기사입력 2012.05.14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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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명훈 칼럼] 저축은행 '막장 드라마'의 조연들
갱도의 막다른 곳, 숭고한 노동의 현장을 뜻하던 '막장'. 어느 날 지상으로 끌려 나오면서 운명이 달라졌다. 갈 데까지 간 인간의 모습, 저질 드라마에 붙는 수식어로 전락했다. 그 막장이 드라마를 뛰어넘어 세력을 넓히고 있다. 막장 정치, 막장 선거에 막장 경영, 막장 대주주까지 등장했다. 바야흐로 정치, 경제, 사회문화를 두루 주름잡는 막장의 전성시대다.

막장 경영의 절정은 얼마 전 영업정지된 미래저축은행의 대주주 김찬경이다. 가짜 법대생의 화려한 전력에 불법 대출, 부당 예금인출, 횡령, 배임을 거쳐 한밤의 밀항 탈출극으로 대미를 장식했다. 그의 활략이 두드러질 뿐이지 퇴출된 저축은행 대주주들의 막장 경영은 오십보백보다.
막장 경영의 실체가 드러나며 의외의 인물들이 얼굴을 드러냈다. 호화 이력에 막장 근처에도 갈 것 같지 않은 사람들이다. 전직 장관, 차관,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국장, 부국장, 대검 검사, 고법 판사, 감사원 간부, 예금보험공사 이사…. 문 닫은 저축은행의 감사와 사외이사의 면면이다. 감사나 사외이사의 첫 번째 임무는 경영진 견제다. 그런 그들이 버티고 있는데 대주주는 회사 돈을 멋대로 빼 쓰고, 수천억원을 부당하게 투자하고, 분식회계를 했다. 그들은 도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그들이 어떤 연유로 막장 경영의 조연 자리에 앉았는지 내막은 알 수 없다. 하지만 미루어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퇴직 후 이런저런 연줄로 운 좋게 '편하고 월급도 쏠쏠한 저축은행의 한 자리'를 차지 한 것이다. 그러니 사명감이나 책임감이 따를 리 없다. 금감원 등의 간부들이 '낙하산' 비난을 무릅쓰고 퇴직 후 금융기관 취업에 올인하는 행태만 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러니 불러준 대주주에게 따지고 대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규정만 제대로 지켰어도 저축은행이 그런 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주주 전횡에 눈감은 감사나 사외이사는 막장 경영의 실질적인 도우미다. 몰래 저지른 일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사회를 제대로 열지 않은 곳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객 돈으로 주는 월급은 꼬박꼬박 챙기면서 도대체 무엇을 했다는 얘기인가. 장ㆍ차관, 금감원 간부, 판ㆍ검사 출신이란 이력이 부끄럽다.
금감원과 검찰은 대주주 비리만을 추궁할 게 아니다. 감사나 사외이사들이 왜 대주주 전횡을 저지하지 못했는지 따지고 책임을 묻는 게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현직은 머지않아 전직이 될 터이니까.

문득 '쿠어스맥주'가 떠올랐다. 갈증 때문이 아니다. 20여년 전 '로키산맥의 물'로 유명한 미국 쿠어스맥주의 회장을 만났다. 1873년에 세워진 가족기업 쿠어스맥주는 당시 4대손 피터 쿠어스 회장이 오너 최고경영자(CEO)였다. 40대의 활기 넘치는 쿠어스 회장이 꺼낸 말은 뜻밖이었다. "오래전부터 한국에 진출하고 싶었다. 그러나 월트디즈니 회장 등 사외이사가 반대해 계획을 포기했다." 오너가 사외이사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상장기업도 아닌데, 왜 그런 불편한 사외이사를 둘까. 오너를 주저앉힌 사외이사는 또 뭔가.

몇 년 후 한국도 사외이사 제도를 도입했다. 쿠어스를 생각하며 변화를 기대했다. 성급한 기대였다. 모두가 알 듯이 대주주의 거수기를 자처하는 사외이사가 줄을 이었다.

빛나는 이력과 경륜을 갖춘 그들이 왜 그런 꼴로 추락할까. 저축은행의 조연 배우들은 왜 무력했을까. '정의란 무엇인가'를 쓴 마이클 샌델은 최근 시장과 도덕의 문제를 제기한 책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내놨다. 그의 말을 흉내 낸다면 '돈 받고 팔 수 없는 것들'을 팔아 버린 가엾은 사람들이다.  


박명훈 주필 pm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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