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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火요일에 읽는 전쟁사]'천군만마'란 말은 대체 어디서 온 말일까?

최종수정 2018.12.04 14:52 기사입력 2018.12.04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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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남북조시대 명장, '진경지'에서 비롯된 '천군만마'
말도 못 타고 무력도 형편없었지만... 우수한 전략, 사기를 북돋는 리더십 강점

(사진=영화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 캡쳐)

(사진=영화 '적벽대전: 거대한 전쟁의 시작' 캡쳐)



[아시아경제 이현우 기자] 흔히 정치권이나 스포츠계에서 거물급 인사가 영입됐을 때 쓰는 말 중 하나로 '천군만마(千軍萬馬)'라는 말이 있다. 영입한 인사의 위력이 천명의 군사와 만명의 군마와 맞먹을 정도로 막강하다 치켜세워줄 때 흔히 사용되는 말로 여러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하지만 해당 사자성어가 탄생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중국 남북조시대의 명장 '진경지(陳慶之)'에 대한 내용은 잘 알려져있지 않다.

원래 천군만마라는 말은 서기 5세기 중국 남북조시대 남조인 양(梁)나라의 장군이었던 진경지로부터 비롯됐던 말이다. 그의 위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적군인 북조에서 "이름난 대장(名師大將)이 있어도 천군만마(千軍萬馬)가 있더라도 백포(白袍)가 나타나면 도망쳐라"라는 동요에서 나왔다. 여기서 백포란 진경지와 그의 군대를 뜻하는 말로, 그와 그의 부대가 출전할 때마다 흰 두루마기 천을 둘렀던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천군만마보다 무서웠던 명장, 진경지는 흔히 우락부락한 용장이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 외모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추정된다. 당시 양나라의 역사에 대해 다룬 역사서인 양서(梁書) 진경지열전에 의하면, 그는 어린시절부터 몸이 허약했고 검술도, 기마술도 형편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어릴 때부터 바둑으로 유명했는데, 훗날 양나라의 태조가 되는 소연(蕭衍)이 황제가 되기 전부터 그를 자주 불러 바둑을 두며 총애했다고 한다. 바둑으로 맺어진 소연과의 인연은 훗날 소연이 양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진경지가 권력 중앙부에 들어가는데 큰 도움이 됐다.
양나라의 태조인 양 고조 무황제 소연(蕭衍)의 초상화. 황위에 오르기 전, 진경지는 그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그와 늘 바둑을 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개인무력은 우수치 않지만 진경지의 전략이 탁월함을 알고 있던 그는 황위에 오른 이후 진경지를 대장군에 임명한다.(사진=위키피디아)

양나라의 태조인 양 고조 무황제 소연(蕭衍)의 초상화. 황위에 오르기 전, 진경지는 그의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그와 늘 바둑을 뒀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개인무력은 우수치 않지만 진경지의 전략이 탁월함을 알고 있던 그는 황위에 오른 이후 진경지를 대장군에 임명한다.(사진=위키피디아)



진경지는 소연이 거병, 양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워 대장군이 됐고, 이후 당시 북쪽에서 대치하던 북위와의 오랜 전면전에서 수차례 승전을 거두며 군공을 높여갔다. 진경지는 항상 적은 수의 정예병력으로 다수의 적군을 물리치면서 유명해졌는데, 그의 핵심 정예부대 3000여명을 늘 흰색 갑옷과 도포를 두르게 해 적군에게 큰 공포심을 안겨줬다. 그의 심리전술은 적은 수의 병력으로 북위의 영토에서 장기간 북벌 원정을 추진하며 병력부족에 시달리던 양나라 군대의 사기를 높이는데 주효했다.

천군만마란 사자성어가 탄생하게 된 전투는 그가 529년 북벌 도중 양나라 군대에 포위됐을 때 벌어진 형양전투였다. 당시 북위에서는 장군 원천목(元天穆)이 대군을 이끌고 형양 일대에 도착했고, 각 지역의 기병, 보병을 합쳐 30만명에 이르는 대군이 양나라군을 포위했다. 진경지가 이끄는 양나라 군대는 7000여명에 불과했다. 싸우기도 전에 사기가 떨어진 양나라군을 향해 진경지는 "그대들이 북벌에 와서 이곳에서 죽인 북위의 부형, 약탈한 자녀는 셀 수 없다. 적군은 모두 우리와 원수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7000명이고 적의 군사는 30여만이므로 오늘은 살기를 도모하지 말아야한다"며 "적들이 아직 다 도착하지 않았을 때 성루를 평정해야할 것이다"라며 진격 명령을 내렸다.

서기 4세기 5호16국의 난 이후 581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와 함께 중국 역사상 대혼란기로 기록돼있다. 진경지가 활약하던 시대, 남조의 양나라는 훨씬 국력이 강한 북위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뒀고, 진경지의 북벌 이후 북위는 크게 약해져 끝내 멸망하게 된다.(자료=위키피디아)

서기 4세기 5호16국의 난 이후 581년 수나라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무려 3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중국의 남북조시대는 춘추전국시대와 함께 중국 역사상 대혼란기로 기록돼있다. 진경지가 활약하던 시대, 남조의 양나라는 훨씬 국력이 강한 북위를 상대로 수많은 승리를 거뒀고, 진경지의 북벌 이후 북위는 크게 약해져 끝내 멸망하게 된다.(자료=위키피디아)



이에 사기가 오른 진경지의 군대는 부대별로 집결 중이던 북위의 군대의 시간차를 노려 공격한다. 먼저 형양성을 단번에 깨트렸고, 배후에서 공격한 북위군도 3000명의 병력으로 막아서서 크게 이겼다. 대군을 이끌고 왔던 원천목 등 북위 장수들은 말을 타고 도망갔고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물자를 노획했다. 이후 북위의 도읍지였던 낙양일대에서는 아이들이 '천군만마'가 있어도 백포는 피하라는 동요를 부르기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일대기로 생겨난 '천군만마'라는 말은 이후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같다"처럼 한 인물의 능력을 찬양할 때 쓰이는 말로 굳어졌다. 양서나 남사(南史)와 같은 당대 사서에서도 진경지의 능력은 춘추시대 중국의 명장인 염파(廉頗), 전한시대 위청(衛靑), 곽거병(藿去病) 등에 버금간다는 찬사를 들었다. 비록 개인적으로는 몸이 허약하고 말도 잘 못타는 장수였지만, 그의 뛰어난 전략과 사람들의 사기를 이끌어내는 리더십은 1500년 가까이 지난 현재에도 회자되고 있다.

이현우 기자 knos84@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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