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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삶터]페밍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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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밍아웃’이라는 말이 세간의 화제다. 페미니스트와 커밍아웃을 합친 말로, 스스로 여성주의자임을 밝히는 선언이다. 강남역 사건 이후, ‘여성혐오(misogyny)’가 전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페미니즘이나 페미니스트와 연관되는 단어들은 격렬한 찬반 논쟁의 한가운데로 들어왔다.

반여성주의자들 사이에서, 혹은 여성주의자들 내부에서도 ‘꼴페미(골수 페미니스트)’나 ‘페미나치(페미니스트와 나치를 합친 단어)’같은 말은 ‘보수꼴통(골수 보수주의자)’이란 말처럼 끔찍한 의미로 쓰인다. 한편 ‘입페미(입만 살아있는 페미니스트)’는 ‘입진보(입만 살아있는 진보주의자)’만큼이나 경멸당한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페미니즘은 평화를 깨뜨리고 분란을 몰고 오는 마법을 부린다.

페밍아웃 역시 그다지 즐거운 맥락에서 활용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그래, 나 페미니스트다. 어쩔래?”같은 의미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검색창에 이 신조어를 입력하면, 소개팅에서 페밍아웃했다가 낭패를 본 경험이며, 토론장에서 혈투를 벌인 일들이 한 바닥은 쏟아진다. 한 네티즌은 “자신이 페미니스트란 걸 밝히는 일을 페밍아웃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낙후된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니 올 연말 지면을 장식할 ‘올해의 단어’에는, 단연코 접두사 ‘페미(femi-)’가 붙어있을 게다. 2016년은 21세기 한국 페미니즘의 원년으로 기록되리라.
지난해 말, 필자가 만든 소셜 벤처 <걸스로봇> 역시 이런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소셜 벤처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회사다. 걸스로봇이 추구하는 사회적 변화는 더 많은 여성들이 이공계에 진출해 끝까지 살아남는 일이다. 그 목적을 위해 요즘 ‘핫’한 ‘로봇’을 전면에 내세웠다. “가장 남성적인 학문인 공학에서, 가장 미래적인 분야인 로봇을 하는, 가장 소외된 존재인 여성을 말한다.”이것이 걸스로봇의 모토였다. 나는 이 모토 아래 사람들을 만나고, 글을 쓰고, 인터뷰를 해왔다. 이 모토를 앞세워 책을 쓰고, 커리큘럼을 바꾸고, 아빠와 딸의 로봇캠프를 열 것이다.

현재 이공계의 여성 비율은 기껏해야 10%에서 15% 정도다. 관련 학계, 관계, 산업계의 최고위직을 차지하는 여성의 비율은 훨씬 더 낮다. 나는 그것이 자연스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봤다. 신이 여성을 만들 때 특별히 실수하지 않고서야, 수학하고 과학하는 머리를 그토록이나 모자라게 만들 리 없으니 말이다. 5 대 5로 칼처럼 나뉘지는 않더라도, 8 대 2, 7 대 3, 6 대 4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공계의 그릇을 넓히고 다양성을 확보하는 측면에서도 그 편이 훨씬 유리하다.

그러니까 이건 일종의 페밍아웃이다. 걸스로봇을 만들 당시만 해도 페밍아웃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 때 내가 했던 건 ‘덕밍아웃’이었다. 덕밍아웃이란 ‘덕후(오타쿠; 병적인 애호가)’임을 커밍아웃한다는 뜻이다. 정식으로 로봇공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20년 전부터 로봇을 사랑해 왔다는 고백이었다. 20년 전 일본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겔리온’을 영접한 뒤로 로봇과 인간은 언제나 나의 화두였다. 13년 전 ‘휴보’를 처음 본 뒤로 온몸이 금속으로 만들어진 휴머노이드 로봇은 언제나 나의 사랑이었다. 이걸 고백하고 나서야 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박사 학위도 없는 내게 일종의 말할 자격이 생긴 거였다.

그런데 이번엔 페밍아웃이다. 회사 하나 하는 데 참 필요한 것들도 많다. 덕밍아웃에 이어 페밍아웃까지 하고 난 지금, 앞으로 무엇을 더 증명하고 고백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반년 된 회사 걸스로봇이 앞뒤로 참 핫하기는 한 것 같아 다행이다. 요즘 유행하는 것들을 다 갖췄으니 이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일만 남은 것인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도 영부인 미셸 여사도, 민주당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도, '해리포터'의 히로인 엠마 왓슨도 모두 페밍아웃했다. 똑똑한 남자들과 매력적인 여자들이 페미니스트가 될 때 얼마나 멋진 일들이 벌어질지 미리 엿보는 즐거움이 쏠쏠하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이진주 걸스로봇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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