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설명이 제법 길어집니다. "토박이는 그 땅에서 태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네. 한곳에 대대로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집안의 자손을 일컫지. 토종닭이나 개 혹은 토박이 식물을 생각해보게. 외국에서 씨를 들여다 이땅에서 키우고 가꿨대서, 그 꽃을 우리 화초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적어도 삼대 이상, 그것도 '사대문 안' 사람들이라야 서울토박이라고 부른다는 말입니다. 범위를 한껏 넓혀봐야, '한양도성 십리 근방'(城底十里)에 살던 사람들까지 넣어주는 게 고작이랍니다. 임금 무릎 밑에 살던 이들과 성벽 그늘 아래 백성들의 묵시적 합의에서 비롯된 관념일 테지요.
양성모음(陽性母音)보다는 음성모음을 즐겨 쓰기 때문인지, 서울말은 대체적으로 부드럽고 온순한 인상입니다. 삼촌을 '삼춘'으로, 돈을 '둔'이라 했습니다. '여보세요'가 '여부세요'에 가깝게 들립니다. '~같아'를 '같어'라 했습니다. 지금 몇 시인지 물으려는 아이가 '아이씨!' 하면서, 시계 찬 아저씨를 불러 세웠습니다.
지금 제 귀엔, 옥희와 어머니 그리고 사랑방 아저씨 목소리가 쟁쟁 울립니다. 이 댁 부인네가 서울말, 서울 억양으로 인사를 건네올 것만 같습니다. "뉘시우? … 어딜 찾아 오셨에요?" 주인 허락도 없이 남의 집 툇마루에 와 앉아, 홍매화에 취해있는 까닭입니다. 남산골 한옥마을, 김춘영 씨댁 '개와(기와)'집입니다.
김 씨는 구한말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사람입니다. 삼청동 그의 집이 여기 와 앉아 있습니다. 우두머리 목수 집부터 '황후' 큰아버지가 살던 집까지 조선 민가 여러 채가 모인 곳입니다. 모두, 시절의 인연을 따라 왔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이 집의 운명이 조금 더 기묘하게 느껴집니다.
'오위장'이라면, 도성 안팎을 순찰하고 궁궐의 안위를 책임지던 직책입니다. 요즘 식으로 이야기하면 서울 경비를 맡은 부대의 고급장교지요. 이 자리에 있던 군인들과 콘크리트 막사와 연병장이 떠오릅니다. 30여 년간(1961-1991) 서울을 지킨 부대였습니다. 지금의 '수도방위사령부'입니다.
이 마을(규모와 구색을 생각하면, 좀 멋쩍은 이름이지만)이 올봄에는 더 각별한 생각을 불러옵니다. 무기고 화약고의 골짜기에서 아름다운 옛집을 만납니다. 남산 자락에서 삼현육각(三絃六角), 우리 소리를 듣습니다. 여기 국악당을 앉힌 것은 잘한 일입니다. 덕분에, 이 마을이 평균적인 관광지의 차원을 훌쩍 넘어섭니다.
어쨌거나 헛기침 소리가 나던 지붕 밑을, '내 집처럼' 들락거리며 조선과 한양을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한옥을 보는 즐거움은 조선 톱과 대팻날의 공력, 목수의 눈썰미를 생각하며 시선을 이리저리 옮기는 데에 있지요. 거기에 약간의 상상력을 보태면 사극(史劇)의 '미장센'을 온몸으로 경험하게 됩니다.
민 씨 댁 뒷마당에서, 곧 피어날 배꽃을 그려봅니다. 이조년(李兆年)의 시조가 그리는 정경입니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하는 삼경(三更)인데/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 보고 싶은 장면입니다. 바라건대, 그런 밤에는 문 닫는 시간을 더 늦추면 좋겠습니다.
배꽃과 달빛이 서로 홀린 밤, 국악당에서는 '정가(正歌)'가 흘러나올 것입니다. 어느 봄밤이 부럽겠습니까. 고향의 달밤처럼 황홀할 것입니다. 서울 사람이 아니면 어떻습니까. 따지고 보면, 처음부터 여기 와 있던 것이 어디 있습니까. 동서남북 사방에서 옮겨온 집들입니다. 팔도에서 모여든 꽃과 나무들입니다.
바람은 산을 넘어왔고, 구름은 강을 건너왔습니다. 제 학생에게도 다시 가르쳐야겠습니다. "딛고 선 땅에 사랑의 뿌리를 내리는 사람, 그는 토박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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