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사 깊이 읽기 - 독일 민족 기억의 장소를 찾아서
철학자 강학순(안양대학교 기독교문화학과 철학교수)은 2011년에 출간한 『존재와 공간』을 통하여 인간 존재의 전제이자 숙명으로서 공간에 대하여 힘차게 선언한다. 인간이 시간과 공간 안에 거주하는 한, 세계는 오롯이 역사의 그릇이 되어 그 안에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케 하는 의미의 생명수가 출렁이게 한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독일사학자 고유경(원광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이 『독일사 깊이 읽기』를 통하여 소환하는 독일의 오랜 역사는 ‘기억의 장소’라고 하는 지나치게 구체적이기에 추상적일 수밖에 없는 공간의 담론이 된다. 그의 아름다운 필치는 독자를 숙고와 반추의 황홀경으로 몰아넣기에 충분하다. 다만 독자의 지식과 지성의 정도에 따라 감지하는 수심에 큰 편차가 있을 터인데, 어느 층위에서 고유경의 언어에 사로잡히든 큰 문제는 없다. 『독일사 깊이 읽기』는 ‘푸른역사’ 출판사가 ‘우리 시각으로 읽는 세계의 역사’ 시리즈 가운데 열세 번째로 펴낸 책으로 부제는 ‘독일 민족 기억의 장소를 찾아’이다.
고유경은 토이토부르크 숲과 키프하우젠 산, 독일 아이제나흐 남쪽에 있는 고성 바르트부르크, 포츠담과 라인강, 라이프치히와 랑에마르크, 그리고 바이마르와 베를린 장벽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토이토부르크 숲은 서기 9년 초가을 라인강 동쪽에서 로마군의 침입을 격퇴함으로써 로마제국의 북쪽 판도를 라인강 서쪽으로 결정해버린 한 사나이에 대한 기억을 환기한다. 그는 게르만의 영웅 헤르만이며 라틴어로는 아르미니우스이다. 그는 위대한 레지스탕스로서 불굴의 독일 정신을 상징하는 첫 아이콘이니 패배하지 않은 베르킨게토릭스, 생포되지 않은 윌리엄 월러스이다. 키프하우젠 산은 붉은 수염을 휘날리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리드리히 1세의 예수를 연상시키는 죽음과 부활의 염원을 표상한다. 포츠담은 사라진 철혈의 왕국 프로이센과 연결되고 라인강은 프랑스에 대항하는 19세기 독일 민족주의의 구심점이다. 1813년의 라이프치히 전투는 나폴레옹 전쟁 즉 ‘해방전쟁’의 결정적 장면이며 랑에마르크는 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다. 바이마르는 독일사의 명암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고 베를린 장벽에는 독일과 세계 현대사가 고스란히 아로새겨졌다.
바이마르를 다루는 고유경의 필치는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가 보기에 바이마르는 ‘포츠담과 더불어 정신(Geist)이라는, 독일인에게는 자긍심과 연관된 단어와 결합된’ 도시이다. ‘바이마르 정신’은 독일 고전주의의 거장 괴테와 실러에 대한 기억과 연결되며 이에 대한 독일인의 자부심은 정파와 세대를 초월했다. 그러나 나치 독재는 이 정신의 도시에 부헨발트 수용소의 끔찍한 기억을 덧씌웠다. 1945년 4월 16일 바이마르의 시민 약 2000명은 에리히 클로스 시장의 인솔로 도시 북서쪽 10㎞ 거리에 있는 에터스베르크 산에 건설된 나치 강제수용소 부헨발트를 방문한다.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타다 남은 뼈와 재들은 시민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훗날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임레 케르테스는 “그들은 아무 것도 몰랐다. 아무 것도,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고유경은 묻는다. “바이마르 시민들은 과연 굳게 닫힌 수용소 철문 안에서 벌어진 끔찍한 일들을 전혀 몰랐을까?” 고유경은 단단한 문장으로 정리해 나간다. “바이마르와 부헨발트, 독일사의 명암을 이토록 뚜렷하게 보여주는 장소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이름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부헨발트는 바이마르에서 출발한다. 휴머니즘과 야만, 민주주의와 독재, 세계적인 문화의 요람과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학살의 장소, 둘은 샴쌍둥이처럼 분리할 수 없다.” 그리고 강인한 삶의 의지로 수용소의 고난을 극복한 사람들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인권과 자유의 가치를 되새긴다.
<고유경 지음/푸른역사/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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