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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詩]송수권의 '여승'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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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장지문에 구멍을 뚫어/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동구밖까지 나섰다/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이별의 장소 또는 여러 갈래의 번뇌와 고뇌/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오던 길로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송수권의 '여승' 중에서

■ 이 시는 깨끗한 사람냄새에 관한 가장 인상 깊은 기록이다. 감기 들린 살구꽃 봄 어린 시인이 빼꼼히 장지문 구멍으로 내다본 거기 서 있는 고깔 쓴 여승에게 품은 엉큼한 그리움. 처마 끝에 걸린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냄새. 시인은 그걸 보았다. 여인과 병치된 저 풍경에서 우러나오는 후각. 소년은 자기도 몰래 그녀를 뒤쫓고 있었다. 가슴 뛰며, 몰래. 그런데 문득 여승이 뒤돌아보며 나직이 말한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이 예스럽고 은근한 말씨 속에 다시 포름한 낮달의 냄새를 느낀다. 시의 행간 속에도 그 냄새가 난다. 한참 코를 킁킁이며 다시 잿빛 옷 일렁이며 훌훌 떠나가는 여승의 뒷모습을 넋 잃고 바라본다. 사람, 참 곱다.





빈섬 이상국 편집부장ㆍ시인 isom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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