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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업성장史]<22>경성방직, 근대기업의 한계를 넘어 한국산업의 상징이 되다(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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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상하가 쓰는 재계 通史

자본·지식 겸비한 김연수, 순익 840억원(당시 돈 70만원) 대기업을 키웠다
호남 대지주 아들 김성수, 日서 귀국 전국 돌며 자금 마련
초보 경영으로 자본금 절반 날려..동생 김연수 대타 등장
수익성 개선 위해 방적공장까지 갖춰 '조선 4대 방적' 등극
일제 강점기 김연수와 그의 경성방직(이하 경방)은 한국기업성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와 의미를 갖는다. 우선 그는 당대에 흔치 않게 대학에서 정규 교육을 받은 1세대 엘리트였으며 전통적인 지주에서 브루조아화한 기업가였다. 또한 개인 회사에서 주식회사로 기업을 키워나가는데 장벽이 높기만 하였던 일제 강점기에, 처음으로 근대 기업의 한계와 굴레를 뛰어넘어 대기업으로 발돋움시킨 선구자였다.

더욱이 일본의 대기업과 견줄만한 대규모 산업으로 성장시켜나간 과정은 곧 한국 기업의 성장과 단련의 과정이 다름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기업적 단련과 학습은 결국 오늘날 삼성 현대 LG와 같은 세계 속의 대기업을 낳은 첫 출발점이었다는 점에서, 김연수와 그의 경방은 우리 근대 산업을 대표하는 역사성마저 갖는다.

▲경성방직에서 조업중인 노동자들

▲경성방직에서 조업중인 노동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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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는 1896년 호남 대지주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6세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아자부중→교토 제3고→교토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26세에 귀국한다.
이보다 앞서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의 형 인촌(仁村) 김성수(제2대 부통령)는 이미 민족교육(보성전문)과 민족언론(동아일보) 사업으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선인들이 옷을 만들어 입기 위해 일본에서 들여오는 광목 값으로 한 해 동안 2700만원(지금 돈 약 3조2400억원)이 새어나간다는 얘길 우연히 전해 듣고 우리 옷은 우리가 자급자족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민족산업을 일으켜야한다는 생각으로 우선 경영난에 빠져있던 '경성직뉴'를 인수했다.

하지만 경성직뉴의 빈약한 생산 시설만으로는 밀려드는 일본산 광목과 도저히 경쟁이 되지 못했다. 보다 근대적 대규모 생산 시설을 갖춘 직포회사를 설립해야 했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경성직뉴를 확대시켜 설립한 민족기업 경성방직㈜였다.

그러나 100만원(지금 돈 약 1200억원)이라는 막대한 자본금을 모으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일본 미쓰이물산이 부산에 세운 조선방직㈜의 자본금이 500만원(지금 돈 약 6000억원)이었던 것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액수였으나 당시 우리의 경제 형편으로 볼 때엔 가히 천문학적인 거액이었다.

한데도 김성수는 경방의 자본금 100만원을 몇몇 유력 부호들에게서 손쉽게 충당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경방의 설립 취지에서 밝히고 있듯 '1인 1주'의 주금 모집에 뜻을 두고 있었다. 1주당 50원(지금 돈 약 600만원)씩 모두 2만주를 발행할 계획이었던 경방은 어느 개인이나 몇몇 소수인의 회사가 아닌 민족기업, 민족산업이 되기를 희망했다.

▲경성방직 영등포공장

▲경성방직 영등포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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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김성수는 전국을 돌아다녔다. 각 지방의 유지들로부터 직접 주금을 모집하고 나섰다.

그러나 당시 고리대금이나 토지 투자 등으로 단기적인 이익을 올리는데 재미를 붙이고 있던 지방의 유지들은 아직 성공 여부조차 불투명하기만한 방직공장 설립에 선뜻 투자하겠다는 이가 많지 않았다. 그나마 민족교육과 민족언론에 뜻을 세운 젊은 선각자라는 명망이 있었기에 주식 공모가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어렵사리 주식 공모가 이루어져 출범하게 된 경방의 주요 발기인 및 임원, 주주들의 분포는 지역적으로나 신분에 있어서도 매우 폭 넓었다. 일부 북한 지역을 포함해 서울 경기 충청 호남 및 영남을 포함하고 있었을 뿐더러 직업 또한 다양했다. 전통적인 양반과 대지주에서부터 은행가, 상인 등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지의 뜻있는 자들을 망라했다.

이어 경방은 황금정 1정목(지금의 을지로 1가)에 사옥 부지를 매입해 사옥 건설에 들어가는 한편 영등포에 공장부지 1만6000평을 매입했다. 그리고 마침내 1923년 영등포공장이 준공돼 제품 생산에 들어갔다. 전체 종업원은 모두 다 조선인들이었으며 아예 공장 정문에다 '우리 공장은 조선인만 채용합니다'라고 써서 붙이기까지 했다.

출범 당시 조직 체계는 명망 높은 사회 원로를 경영진에 모신다는 원칙 아래, 철종의 사위로 갑신정변의 주역이었던 박영효를 초대사장으로 추대하고 전무에 박용희, 지배인에 이강현, 서무에 김성집, 회계에 이희승(국어학자) 등으로 구성되었다. 대부분 일본에서 정규 대학 교육을 받은 당대 엘리트들이었다.

▲경성방직의 모체가 된 경성직뉴 (출처: 경성방직 50년)

▲경성방직의 모체가 된 경성직뉴 (출처: 경성방직 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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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대도 기업경영에 있어서는 모두가 풋내기일 수밖엔 없었다. 이때 김성수는 28세, 박용희는 34세, 이강현은 31세에 불과했으며 사회 활동 경력이 채 10년도 되지 않은 청년들이었다. 더욱이 기업을 경영해본 경험이라야 고작 2~3년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런 문제는 경방의 출범과 함께 곧바로 불거져 나왔다. 경방 출범 첫 해였던 1919년 말과 이듬해 초에 단기 이익을 노리고서 여유 자금을 잘못 투자하였다가 위기로 내몰리고 말았다. 경방의 초보 경영진은 당시 면제품 가격의 급등세에 현혹되어 영등포공장 건립 자금으로 면제품 투기 거래에 나섰다가 총 13만2,550원(지금 돈 약 169억600만원)의 손실을 입으면서, 회사 설립 이후 불과 반년여 만에 자본금의 절반가량을 날리고 만 것이다.

이쯤 되자 경방의 초보 경영진은 중역회의를 열고서 회사의 해산까지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경제 불황의 한복판에서 막대한 사업 자금을 날리고 말았으니 이젠 꼼짝없이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다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김성수는 3ㆍ1운동 이후 고조된 민족의식의 소용돌이 속에서 출범해 민족에게 희망을 안겨줬던 경방의 문을 결코 닫을 수 없었다.

우선 그는 공장 건립과 함께 설비 도입을 중단 없이 추진해나가는 한편 시급한 추가적 자금 문제 해결에 발 벗고 나섰다. 집안의 토지를 담보로 식산은행으로부터 자금을 차입한데 이어 주주들에게 추가 납입을 호소했다. 하지만 가망이 없어 보인다며 모두가 외면하면서 그 혼자 경방의 지분을 떠안지 않으면 안 되었다.

결국 김성수는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동생 김연수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었다. 위기에 처한 경방의 경영을 동생 김연수에게 맡기고 자신은 민족교육과 민족언론 사업에만 몰두하고자 했다.

일본을 오갈 때마다 곳곳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공장 굴뚝들을 목격하면서 산업을 일으켜 민족경제의 자립에 뜻을 두었던 김연수는 그런 형의 권유에 흔쾌히 따랐다.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듬해에 경방의 전체 주식 2만주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9274주를 인수하면서 경영에 뛰어들게 된다.

김연수를 중심으로 새롭게 진용을 갖추게 된 경방은 다시 설비를 들여오는 한편 기술자와 직공을 훈련시켜 마침내 제품 생산에 들어갈 수 있었다. 또 이러한 사전 준비 과정은 당대 한국인 기업인들과는 전연 다른 면모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우선 이들에겐 확고한 사업 의지가 있었다. 비록 최초 납입 자본금의 절반가량을 잃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기도 했으나 주주와 임원들을 설득하고 자신의 부모를 이해시켜 사업을 계속하는 끈질긴 면모를 보여주었다.

둘째 경방의 재무 구조를 탄탄한 기초 위에 올려놓았다. 종래의 한국인 회사들은 흔히 과도한 고액 배당으로 회사의 자금을 빼내가곤 했지만, 이들은 사업에 필요한 자본금의 추가 차입을 통해서 필요 자금을 조달케 했다.

셋째 당대 최상의 젊은 지식인 그룹이었다. 기업경영의 경험이 일천하다는 것을 빼고는 경제학 정치학 법학 공학 전공의 다양한 지식 배경을 지녔을 뿐 아니라, 아울러 실천의지와 책임의식이 뚜렷했다.

넷째 선진 기술을 제대로 학습 받았다. 경방은 조선과 일본에서 공업고등학교 졸업자들을 대거 확보하고, 또 그들을 일본에 파견하여 선진 기술을 교육받도록 했다.

다섯째 정부에 대한 교섭력이나 사회 여론을 형성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다. 이들은 원군 역할을 하는 김성수의 동아일보 등을 통해 자신들의 요청을 총독부에 전하고 또한 일반 사회에 호소할 수가 있었다. 때문에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생존 테스트에 들어갔을 때 보이지 않는 힘이 됐다.

또 이런 점들은 당대 다른 한국인 기업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점이었다. 설령 찾는다하더라도 극히 제한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일 따름이었다.

그 결과 경방은 초기의 위기를 극복해낸 뒤 해마다 생산량을 늘려나갈 수 있었다. 출범 첫 해인 1923년 3만8652필이던 포목 생산량이 1929년에는 19만9351필로 5배 이상 늘어났다. 그렇다하더라도 1920년대 말까지 경방은 전체 포목 시장에서 매우 작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말해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보다 제품을 취급해줄 판매점이 필요로 했다. 한데 경방보다 한발 앞서 생산을 시작한 미쓰이물산의 조선방직은 도요면화㈜에 판매를 위탁했다. 도요면화는 면화 및 면사포의 국내외 유통망을 갖춘 전문 판매상사였기 때문에, 조선방직은 판로 개척에서부터 판매 대금 회수에 이르기까지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그에 반해 경방은 그러한 조건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도요면화와 같은 거대 판매상사는 물론이고 각 지역의 유력한 조선 면사포상인들조차 경방의 제품을 거의 취급하지 않고 있었다. 요컨대 국내 주요 면사포상점을 독점하다시피한 일본인들은 경방이 한국인 기업이라는 이유로 또한 각 지역의 조선 면사포상인들은 경방의 인지도가 일본 방직회사의 브랜드에 비해 떨어져 판매상 실익이 적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런 점을 타개할 대책으로 경방의 젊은 경영진은 세 가지 전략을 수립했다. 경성을 비롯해 중심부 시장을 공략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주변부 시장부터 착실히 파고들기로 한 것이다. 두 번째는 경방이 민족기업이라는 민족 정서에 적극 호소하고 나섰다. 마지막으로는 한국인 기호에 알맞은 맞춤식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더욱이 1930년대에 들어 예기치 않은 새로운 기회마저 열렸다. 일본이 경제 공황으로 인한 사회적 불안을 이기지 못해 1931년 만주에서 전쟁을 일으켜 괴뢰국가인 만주국을 세웠다.

이와 함께 전에 볼 수 없는 급속한 공업화와 도시화, 또 그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이어졌다. 일본이 중국 대륙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는 가운데 조선의 경제 또한 급속한 확장의 기회를 맞았던 것이다.

여기에 발맞춰 조선의 면방직 시장에서 수입대체 여지가 크다고 판단한 경방의 경영진은 이내 증설 투자에 들어갔다. 자본 차입을 통해서 설비를 크게 확장시켰다. 그 속도는 일본의 대규모 방적 기업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러나 김연수의 경방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설비 증설로 생산량이 크게 늘었으나 시장 환경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방직공업의 눈부신 성장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수익성은 저조하기만 했다.

그래서 찾은 답안이 몸집을 늘려 방적공장을 겸하자는 거였다. 방직공장만으로는 수익성 면에서 일본의 대규모 방적 기업과 경쟁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결국 경방은 방적공장 건설에 경방의 자본금보다도 많은 174만원(지금 돈 약 2,089억)을 들였다. 이에 따라 경방은 방적기 2만5,600추와 방직기 896대를 갖추게 되면서, 1930년대 공업화의 주역이었던 미쓰이물산의 조선방직, 도요방적, 가네가후지방적과 함께 '조선 4대방大紡' 체제의 일원으로 당당히 올라설 수 있었다.

이같이 체질을 강화한 경방은 조면, 제사, 직포, 염색 가공에 이르는 모든 공정을 일관 처리할 수 있는 종합 면방직 기업으로써, 자본, 설비, 기술, 경쟁, 조직 면에서 비로소 근대 기업의 한계를 뛰어넘어 고속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일본의 산업과 조금이라도 경쟁이 된다 싶으면 철저히 봉쇄를 당하면서 자본금이 100만원대 이상인 민족기업을 찾아볼 수 없는 가운데 1942년 경방의 자본금은 무려 1000만원(지금 돈 약 1조2000억원)까지 늘어났다.

경방의 수익성 또한 민족기업 가운데 단연 으뜸이었다. 이 시기 경방이 매분기 별로 70만원(지금 돈 약 840억원)대의 순이익을 올린 반면 상업계 대표기업인 박흥식의 화신백화점이 8만~18만원, 금광업으로 성공한 이종만의 대동광업이 12만~17만원, 6대 은행 가운데 민규식의 동일은행(현 우리은행)이 13만~17만원, 한상룡의 조선생명보험이 4만~5만원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조선 제1의 기업가'인 김연수의 경방은 국내에서 더 이상 성장이 어려웠다. 전시 통제 아래에서 공정 가격제로 수익성이 크게 나아지긴 하였다지만, 그것은 기업 활동을 통제받는 데서 얻은 반대급부일 따름이었다.

어느덧 일본 기업과 견줄만한 대규모 기업으로 성장한 경방은 이제 무언가 새로운 경제영토가 필요했다. 마침내 조선 바깥으로 눈을 돌리게 되는 것이다. 조선에서 더 이상 성장이 어려워진 대기업 경방이 조선 밖의 만주에서 새로운 도전을 모색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박상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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