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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부자들]松商이 씨뿌린 나눔 큰 열매 맺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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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 부자의 뿌리를 찾아서

[한국의 부자들]松商이 씨뿌린 나눔 큰 열매 맺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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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로 번 돈 종업원·빈민 살리자’ 경영 원칙 고수
치밀한 경영 전략·천재적 사업 수완으로 富 축적


근대 이전의 민족사 속에서 상업 활동을 통해 부(富)를 축적한 대표적 인물 집단을 꼽으라면 단연 개성상인(송상(松商))을 꼽을 수 있다. 몇 명을 딱히 꼽아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걸쳐 거액의 부를 창출한 개성상인의 숫자는 너무나 많다.
고려의 수도인 개성을 중심으로 상업 활동을 벌였던 개성상인들은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탄탄한 기반을 갖고 있는 부자 집단으로 전해지고 있다.

개성상인의 뿌리는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의 가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개성 출신 신흥 귀족이었던 왕씨 가문은 대대로 대당(大唐)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했다.

왕건의 조상은 상당한 규모의 해상세력을 이뤘는데, 이 해상세력은 개성을 중심으로 지금의 대동강 이남지역과 강화도 및 한강 하류 일대에서 큰 영향력을 떨쳤다.
해상세력에서 비롯된 개성상인은 훗날 고려가 송나라와 왜(倭)는 물론 중동의 아라비아와의 무역을 통해 국부를 창출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개성상인은 평안도 의주지역을 연고로 하는 만상(灣商, 의주상인)과 서울 등 한강 유역을 연고로 하는 강상(江商, 경강상인) 등과 함께 중세부터 근대를 잇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상업 계층이자 부유층으로 자리매김했다.

개성상인의 자본은 꾸준한 성장 끝에 근대 이후 국내 최대의 토착 민간자본으로 성장해, 개항 후 외국 열강의 자본 침입에 대항하는 가장 강한 민간자본으로 대두됐다.


‘나눔형 짠돌이’ 경영 철학 배워야

타고난 사업 수완과 탄탄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부를 축적한 개성상인의 성공 비결은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신용과 상도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추구하는 기업가 정신, 그리고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는 무차입 경영 원칙, 남에게는 나눔을 크게 베풀되 자신에게는 무조건 아껴야 한다는 ‘나눔형 짠돌이 정신’이다.

개성상인들은 다른 상인들과 거래를 할 때 신용을 지키고, 거래 상대의 마음을 상하게 해서 안 된다는 원칙을 늘 지켜왔다. 이러한 신뢰 덕분에 조선시대 개성상인들의 어음은 두메산골의 객주와 여각에서도 별 탈 없이 통용됐다.

개성상인은 사업을 확장할 때 단 한 푼도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았다. 남의 돈을 빌려 쓴 뒤 이를 잘 키우면 다행이지만, 가시적인 성장에 실패하게 되면 영업이익의 대부분은 빚을 갚는데 쓰이고 만다. 개성상인들은 이 점을 늘 염두에 두고 사업을 펼쳤다.

빚을 만들지 않는 경영 철칙 덕분에 개성상인은 탄탄한 알짜배기 부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개성 출신 부자들의 짠돌이 정신은 ‘세상에 저런 사람이 있나’ 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빈민 구제, 육영사업 등에 기꺼이 쾌척하고, 종업원들에 대한 대우를 늘 섭섭하지 않게 했다.

‘사업 이익금으로 종업원을 먹여 살리고, 어려운 이웃에게 나눠주는 것이 장사치의 임무’라는 개성상인의 또 다른 경영 철칙 때문이었다.

개성상인의 이러한 나눔 정신은 고 서성환 태평양화학(현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고 이회림 동양제철화학 창업주 등 후세 개성상인의 행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들은 선대 상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이어받아 사회사업과 육영사업에 수천억 원을 아낌없이 투자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은 비싼 음식, 좋은 옷을 늘 멀리 했다. 1970년대 태평양장학재단과 태평양학원 설립에는 거액을 기꺼이 쾌척했지만, 자신의 점심식사만큼은 싸구려 회사 구내식당을 고집했던 서성환 회장의 이야기는 개성상인의 ‘나눔형 짠돌이’ 특성을 가장 잘 알려주는 일화다.

그동안 우리가 개성상인의 나눔 행적을 쉽게 알기 어려웠던 것은 자신의 자선을 세상에 알리는 것을 꺼려했던 개성상인의 특성도 한몫 했다.


조선의 義人 임상옥과 김만덕

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보낸 개성상인들은 조선시대 들어서 큰 타격을 받았다. 조선왕조가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민간 상인에 의한 무역이 금지된 후 상업을 통해 거액의 부를 축적한 조선 초·중기의 인물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실학이 전래되고, 상업이 다시 부흥하면서 부를 축적한 부자들이 속속 나타나기 시작한다. 임상옥과 김만덕은 가장 대표적인 조선 후기의 상업 부자로 볼 수 있다. 이 두 거상(巨商)의 활약상은 TV 드라마로도 제작돼 잘 알려졌다.

임상옥은 1796년부터 상업을 시작했다. 그는 1810년 이조판서 박종경의 정치적 배경을 이용해 국내 최초로 국경지대에서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게 됐고, 이것이 부의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그의 천재적인 사업 수완은 청나라에서 발휘됐다. 1821년 변무사의 수행원으로 청나라에 갔을 때 베이징 상인들의 불매 동맹을 교묘한 방법으로 깨뜨리고, 그들의 상품을 원가의 수십 배로 되팔아 막대한 재화를 벌었다.

중개상인 김응열의 딸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란 김만덕은 객주를 차려 제주 특산물인 귤, 미역, 말총, 양태(갓의 재료)를 육지의 옷감, 장신구, 화장품과 교환하여 판매하는 상업에 종사해 많은 돈을 벌었다. 임상옥과 김만덕의 성공 비결은 18세기 조선시대의 트렌드를 제대로 읽은 것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우리는 두 거상을 단순히 돈만 많이 번 부자로 기억해서는 안 될 이유가 있다. 돈을 벌기도 많이 벌었지만, 자선사업으로도 이름을 떨친 의로운 부자이기 때문이다.

임상옥과 김만덕은 자신이 벌어들인 돈을 빈민 구제 등의 자선사업에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임상옥은 1821년 청나라에서 벌어들인 수익금으로 굶주리는 백성과 수재민을 구제했다. 김만덕은 1793년 제주도 일원에서 심각한 흉년이 일어나자 전 재산을 풀어 5백여 석의 쌀을 산 뒤, 이중 450여 석을 모두 구호식량으로 기부해 아사 위기에 빠졌던 제주도 민중들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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