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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주DNA] 대림 이재준 회장 "신용을 생명으로 알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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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소민호 기자] 기업의 생명력이 유지되고 성장하려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바로 신뢰다. 기업과 소비자간 믿음, 기업 내부에서 상하간의 신뢰는 기업에 필수요건이다. 대림산업 창업주 수암 이재준 회장은 신용과 신뢰를 늘상 강조하고 몸소 실천하며 모범을 보였다.
◇사소한 시간약속도 철저.. "여유 찾고 경제적으로도 이득"= 이 회장의 한 측근의 일화가 유명하다. 그는 이 회장을 모시고 중국 여행을 간 적이 있었다고 한다. 약속시간에 맞춰 나간 그 측근은 이미 이 회장이 나와서 기다리는 것을 보고 적이 당황했다. 그는 다음날 8분쯤 전에 장소에 나갔으나 역시 이 회장보다 늦은 시간이었다. 사흘째 되는 날은 20분을 일찍 약속장소에 나갔다. 그랬더니 잠시 후 이 회장이 등장했다고 한다. 시간은 정확히 15분 전.

그가 이 회장에게 일찍 나오는 이유를 묻자 이 회장은 "나는 약속시간보다 15분 일찍 나가는 것을 철칙으로 하고 있다"며 세가지 이유를 댔다고 한다. 우선 일찍 나가면 서두르지 않아도 되니 여유있는 마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미리 나가있으면 상대의 호감을 살 수 있고 서두르면 택시 등을 타야 하지만 일찍 나가면 전철이나 버스를 이용해도 되니 경제적으로도 좋다는 얘기였다.

이 회장이 사적인 만남에서조차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 것은 '코리안 타임'에 익숙해진 이들에겐 귀감이 된다. 이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나는 이것만은 꼭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고 또 실천해 왔지. 그것은 약속, 시간 약속이야. 제일 쉬운 시간 약속도 지키지 못하면서 무슨 큰일을 하겠는가."
이런 그에게 더욱이 기업의 경영과 관련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다.

수암은 이러한 촌철살인의 경구들은 어려서 어른들한테 들은 말을 그대로 흉내냈을 뿐이라고 둘러댔다. 평생 사업운영의 기본요건으로 정직과 성실, 그리고 신용을 강조하게 된 것도 사실은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이라는 것이다.

이 회장의 부친은 늘 그에게 "돈은 빌려올 수 있고 기계장비는 사올 수가 있지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고 강조했다고 한다. 사람은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 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손해도 끼칠 수 있으므로 사람 됨됨이를 보는 안목이야말로 기업성패의 관건이라는 신념을 갖도록 한 것이다. 이 회장은 사람을 바로 쓰기 위해 공정한 인사를 철칙으로 삼았고 거래에 있어서도 정실이 끼어드는 것을 극도로 혐오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서슬 퍼렇던 제3공화국 시절, 청와대로부터 들어온 인사청탁을 고심 끝에 물리쳤던 일화일 것이다. 훗날 수암은 "내가 사장이었다면 몰라도 아랫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할 입장에서 인사청탁을 들어줄 수가 없었다"고 회상했다.

◇6·25 동란 후 염전사업도 신뢰지켜 완공= 6·25 전쟁으로 피폐했던 당시 대림산업이 국가적으로 중요한 토목공사인 염전사업을 수행할 때도 신뢰를 생명으로 여기고 난관을 돌파했다. 소금생산이 국가적 사업이란 얘기는 그 당시였으니 가능했던 수식어다.

소금은 해방되던 해부터 대책을 따로 만들어야 할 만큼 시급히 공급해야 할 품목이었다. 그래서 마카오, 북미 등지에서 한 해 약 18만톤씩을 수입했지만 해마다 김장철만 되면 '파동'을 겪어야 했다. 정부는 이에따라 염전 개발을 서둘렀다.

당시 대림산업이 조성하던 반월염전은 경기도 화성군 매송면 사리와 갯골을 건너 시흥군 군자면 초지리를 연결하는 길이 약 3㎞의 제방을 막아 염전으로 조성하는 대규모 토목공사였다. 중장비가 귀해 순전히 인력으로 끌고 미는 토차(土車)와 지게를 이용한 공사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착공 약 1년만인 1952년 여름, 제방축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으나 큰 장마끝 백중사리의 거센 물길에 최종 물막이 제방 약 350m가 유실되고 말았다. 국회에서 진상조사가 벌어지는 수난 속에 이재준 회장은 당시 국회의원들의 현장 안내를 맡으며 천재지변임을 입증하고 재시공에 들어가도록 했다.

이런 진통 끝에 1954년 축조공사를 마무리하고 그 이후로도 잡공사 등을 거쳐 무려 8년만인 1960년 4월말 최종 준공을 하게 됐다. 국민의 필수품인 소금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도록 국가사업을 진두지휘한 것이다.

◇전쟁이 나도 발주처와 약속 지킨 뚝심.. 이란 정부 '감동'= 해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이란에 진출해 있던 건설업체들은 대부분 철수했다. 대림산업이 '캉간 가스정제공장 프로젝트'를 수행할 당시였다. 하지만 대림만은 남아서 공사를 수행했다. 발주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위험을 무릅쓴 대림의 노력은 하지만 허사였다. 전쟁이라는게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이라크 공군기의 폭격으로 대규모 인명피해와 함께 완공을 앞두고 있던 플랜트 공장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대림은 이런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1990년 8월 프로젝트를 기어이 완수해냈다. 이런 헌신적인 노력 끝에 이란 정부에서는 대림을 '피를 나눈 형제'이자 '가장 믿을 수 있는 건설 파트너'로 인정받게 됐다.

덕분에 대림산업은 국내 건설업체 가운데 이란에서 가장 많은 실적인 26건의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소득을 안게 됐다. 금액규모로는 50억달러에 달한다. 또한 지금까지도 이란 지역의 각종 공사 제안서를 빠짐없이 받기도 한다.

이로써 이란 캉간 가스정제공장 프로젝트는 대림 70년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으로 평가받기도 하지만 세계 유수의 발주처 관계자들에게는 대림의 '무한신뢰' 브랜드를 널리 알리는 계기로 작용했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한국 건설업체인 대림산업은 끝까지 맡은 사업을 반드시 완수한다는 등식도 만들었다.

수암 이재준 회장이 강조한 신뢰를 지킨 결과가 70년의 역사를 가진 메이저 건설업체의 대림산업으로 성장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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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민호 기자 sm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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