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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그래도 '풍경이 있는 장소'로 떠나자

최종수정 2019.08.08 12:00 기사입력 2019.08.0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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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그래도 '풍경이 있는 장소'로 떠나자

여름날이면 언제나 시원한 나무 그늘 밑에 모여 쉬고 놀 수 있는 자리를 펴주었던 아름드리 정자나무, 단번에 갈증을 풀어줄 찬물을 언제나 아낌없이 내어 주었던 우물, 마을을 병풍처럼 감싸는 수런수런한 대나무 숲, 장마 지면 더욱 힘차게 흘렀던 실개천, 하얀 박꽃이 무성하게 피어났던 초가지붕, 누워서 아스라한 별들과 은하수를 바라볼 수 있었던 마당의 대나무 평상, 동산 앞 풀섶에서 반짝이며 춤추던 반딧불이들! 이런 여름날의 시골 풍경은 오륙십년대에 유년기를 보냈던 시니어 세대들에게 친숙한 추억과 아련한 시적 몽상을 불러일으키에 충분하다.


지금 청풍명월을 노래할 때는 아니다. 하지만 숨막히는 무더위와 정치적 공해로부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식힐 필요가 있다. 임진왜란 시 봉기했던 의병들의 스승이었던 남명(南冥) 조식 선생은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세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는 시조를 남겼다.


그리고 선생은 자연이란 책 속에서 엄중한 현실을 가늠하였다. "하늘의 바람 거대한 사막을 흔들고/ 흘러가는 구름은 천지를 덮어 가린다/ 솔개의 날아오름은 당연하나/ 까마귀 맞지 않게 울어대니 무얼 하려나." 특히 정선의 '금강전도'에 나타난 진경산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심사정의 '하경산수'는 대표적인 풍경화이다. 저런 시문과 풍경화 속에서 조상님들의 자연과 교감하는 호연지기를 새롭게 전유할 수 있다.


풍경은 현실극복을 위한 예기치 않은 혜안과 영감을 준다. 자연적 경관에 사람의 마음이 상호작용할 때, 그것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서려 있는 문화와 역사 유적지에서 큰 울림을 주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풍경은 결코 사람과 무관한 자연적 경관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장소 혼(spirit of place)'으로서 마음 속에 들어오고, 마음은 풍경을 창조한다. 무엇보다 '풍경이 있는 장소'는 인간적 근원적 갈망이 충족되는 의미와 가치의 중심점이며, 또한 참된 역사적 실존의 구심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첨단 산업화된 도시들은 대체로 표정과 풍경이 없다. 어느 도시를 가든 편의점, 커피숍, 베이커리, 마트, 백화점, 빌딩, 아파트, 학교, 길거리 등이 대동소이하다. 풍경이 없는 도시에서는 장소가 가진 숨결, 즉 고유한 전통과 역사의 얼굴을 쉽게 만나기가 어렵다. 이런 도시에는 획일화되고 표준화된 교통공간, 사무공간과 상업공간들이 점령하고 있다. 이러한 역사성을 상실한 풍경 없는 도시는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 도리어 그것은 우리의 감각과 정신을 삭막하게 만들고 황폐하게 만든다.

우리 모두는 생존이란 과제와 엄중한 역사적 현실 앞에 하루하루를 팍팍하고 고달프게 살아간다. 그러나 단 며칠이라도 쉼과 내려놓음 그리고 새로운 힘의 재충전이 필요하다. 운무 자욱한 산봉우리, 깊은 숲속의 계곡에서 흐르는 옥빛 푸른 물과 청량한 폭포, 또한 코발트색과 에메랄드빛 바다와 끝없는 수평선과 해안선 그리고 산호초로 둘러싸인 맹그로브 숲의 풍경, 나아가 심원한 감동을 안겨주는 전통과 역사가 살아 숨쉬는 풍경이 그리운 계절이다.


'풍경이 있는 장소' 속에서 쉼과 정서적 풍요의 체험은 사치가 아니다. 도리어 그것은 원초적인 심미적 감성과 내밀한 정신 그리고 값진 역사의식을 일깨운다. 아무래도 지금은 지친 삶에 활력을 되찾기 위해 무표정한 도시의 공간으로부터 '풍경이 있는 장소'로 떠날 시간이다.


강학순 안양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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