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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톺아보기] 감이 익어가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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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라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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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4)의 고향인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도에 다녀왔다. 그곳에 김환기의 고택이 남아 있다. 김환기는 지금 가장 비싼 작품의 작가가 됐다. 하지만 이를 초연한 듯 그 뿌리가 된 낡은 가옥에서는 운상기품(雲上氣稟)이 느껴진다.


이곳은 김환기가 일곱 살 되던 해 태어난 집 바로 앞에 그의 부친이 지은 기와집이다. 안채는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김환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공간이다. 안채 오른편에 1940년대 지어진 별채가 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김환기가 방학 때 내려와 화실로 사용하던 곳이다. 원래 초가집이었고 넓은 대청으로 된 화실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개조돼 별도의 담장으로 구분한 살림집이다.

어린 김환기가 뛰어 놀았을 넓은 마당과 그 앞으로 펼쳐진 탁 트인 풍광을 마루에 앉아 바라보았다. 화가가 되기 전 문학가를 꿈꾼 젊은 예술가의 초상이 보이는 듯했다. 김환기는 글쓰기를 좋아했다. 일기·편지는 물론이고 '신천지', '현대공론' 같은 문학잡지와 신문에 시·수필을 남긴 문인이기도 했다. 김환기의 글귀를 떠올리며 정취에 빠져 있을 즈음일까. 감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성북동에는 근원(近園) 김용준과 김환기의 인연을 품은 집터가 있다. 집 이름은 노시산방(老枾山房). 소설가 이태준이 이 집에 늙은 감나무가 있어 붙여준 이름이다. 노시산방은 본래 김용준이 살았던 집인데 김환기를 아끼던 그가 결혼 선물로 싸게 물려줬다. 김환기는 짧은 기간이지만 이곳에서 신혼을 보내게 된다.


화가이자 평론가·수필가였던 김용준은 글에서 김환기를 종종 언급했다. "노시산방이란 한 덩어리 환영을 인연삼아 까부러져 하는 예술심이 살아나고 거기에서 현대가 가질 수 없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얻었다는 것이 무엇보다 기쁜 일이다."

김용준의 수필 '육장후기'에는 김환기를 생각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그는 또한 김환기의 모습을 화폭에 담기도 했다. 김환기·김향안 부부가 감이 소담하게 열린 굵은 감나무와 함께 있는 노시산방의 정경 그림은 인상적이다. 노시산방은 사라졌지만 이런 기억을 간직한 늙은 감나무 두 그루가 두 예술가인 양 지금도 그곳에 그대로 서 있다.


김환기의 생가에서 만난 오래된 감나무는 내게 하나의 표상이 된 듯하다. 독일의 철학자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가 직관적 표상의 본래 의미를 깨닫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던가. 낯선 곳에서 마주하게 되는 형상들이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분명 보이지 않는 심상의 고리가 연결돼 있기 때문이리라.


김환기는 자신의 아호 '수화(樹話)'에 나무를 담았다. 그저 나무가 좋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푸른 산과 바다를 바라보며 자란 그는 서울에서도 나무에 파묻혀 살고 싶어했다. 예술가에게도 마음을 채우는 형상이 있는 것이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김환기가 꿈을 만들어 가던 시절의 장소에서 내게 떠오른 글귀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9개월 전 쓴 일기다. 생의 마지막으로 향하는 순간에 예술가는 모든 것의 근원으로 향했다. '그저 꿈 같은 섬'이라고 했던 이 고향 땅은 예술가로서 먼 길을 떠나는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잡았다.


계절을 느낄 여유도 없이 시간 속에 갇혀 몇 달째 보내고 있다. 어느 새 차가운 공기가 몸을 감싸온다. 갑작스런 변화가 만들어준 또 다른 일상은 많은 것을 내면으로 향하게 한다. 일상의 표상들을 하나씩 꺼내 보는 것은 어떨까. 어쩌면 오랜 시간 잊고 지냈던 혹은 그냥 지나쳐온 많은 것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김보라 큐레이터·성북구립미술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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